주원영 Joo, Wonyoung

Text: Artist Note

[] 2014 전시서문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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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원영
작성일 2024-01-06
조회 65

시간의 궤적으로서의 몸 그리고 그 몸이 보는 공간 시각 예술에 있어서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본다’라는 인식행위를 기반으로 작업을 해왔다. 모방이니 재현이니 하는 문제는 이러한 이유에서 예술이라는 개념에 중요한 기반 중 하나로 작동되어 왔다. 그렇다면 ‘본다’라는 행위를 할 때 행위자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보는 행위를 하는 주체의 시각 안으로 들어온 타자로서의 사물 그리고 이 세계 전체일 것이다. 이때 이러한 ‘본다’라는 행위에는 몇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인식 주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 같은 시각 행위 주체가 존립할 수 있는 지지체 구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구조 안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이며 독립된 개별자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과 사유의 주체로서의 현대인의 자각이 바로 이러한 전제 위에 있었다. 그런데 주원영 작가는 이러한 전제들과는 다른 지점에서 ‘본다’라는 인간 행위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시각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해 오고 있다. 그가 작품명제에서 사용해온 ‘소리없이’, ‘스며있는’, ’몸의 시선’과 같은 수사(修辭)들은 그가 어떠한 개념 위에서 작업을 해오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는 부분들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에는 그의 이전 작업에서 보여주었던 작업처럼 쉽게 알아 보기 어려운 여러 가지 형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간혹 그의 작업에는 건축 구조물과 같은 형상이 보이기도 하지만 라인 드로잉처럼 단순화되고 평면으로 압축된 듯한 느낌의 사물 혹은 공간을 보여주는데 사물의 외형 혹은 단면처럼 보이는 작업에서는 어떤 덩어리의 체적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선적인 감각만 남길 뿐이다. 그의 작업은 일정한 형상이 지시하지만 사물과 공간에 대해 실제적으로 혹은 사실적 방식으로도 경험하지 못하도록 환영을 배제하고 극도로 단순화 시켜서 작업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의 작업은 특정 사물이나 공간을 지시하고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작업은 단지 공간에 대한 경험이 갖고 있는 시각 체계만을 지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원영 작가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본다’라는 행위가 어느 특정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했고 작업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본다’라는 행위에 대한 담론에서는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독립된 개별자로서의 개인 주체가 눈에 의해 시각적으로 보고 경험하는 행위 방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주원영 작가에게 있어서‘본다’라는 행위는 눈에 의해서가 아니라 몸에 의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사물의 시각적 인식행위 역시 눈에서의 감각이 머리에 전달되어 과거의 기억과 경험과 반응하며 이루어진다기 보다는 몸에 스며있었던 알 수 없는 감각들과 반응할 때 이루어지는 각성의 순간들을 확인하는 행위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기억과 경험 속의 무엇과 유사해 보이는 일루젼을 보여주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작업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부피를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제한된 형상 전체에 대한 한 단면과 공간적 경험에서의 흐르는 시간에 대한 찰라적 순간들일 뿐이다. 그래서 철조로 그려낸 듯 한 드로잉적 형상은 특정한 사물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를 사물이다. 굳이 그 사물을 읽어보려 한다면 사물에 대한 개별적 경험을 합쳐 놓은듯한 경험의 융합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특정 기관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줄기세포처럼 특정 사물로 형성되기 이전의 사물이며 사물 이후의 해체된 사물 같기도 하다. 작가는 그렇게 세계를 보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세계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작가는 그 세계를 보고 있는 작가 자신 역시 일체화된 주체가 아닌 연결된 주체 혹은 연장된 주체로서의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넘어선 기억 그리고 경험이 자신의 몸 위로 물이 넘치듯 넘쳐 오르고 수면아래 잠겨 있던 알 수 없는 영역이 자신의 인식체계 위로 넘어오는 순간과 같은 특별한 경험, 그리고 이러한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 일체화된 주체는 해체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당연히 개별 주체를 단위로 주어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주원영작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몸 안에 담겨있는 DNA에는 ‘수 많은 다른 나’에 대한 삶의 흔적과 정보가 담겨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 자신과 경험과 겹쳐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자신이 보고 있는 현재에 대한 경험의 순간이라는 것은 독립된 주체의 개별 경험을 이미 넘어서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있어서는 ‘본다’라는 행위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의 궤적이 압축된 형태로 다가온 순간에 대한 각성이며 데자뷰처럼 겹쳐져서 다가오는 사물과 공간에 대해 보는 것은 ‘수 많은 다른 나’에 의한 이전의 봄을 경험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쌍곡선이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사건과 같은 것인데 내 안의 ‘수많은 다른 나’의 경험과 교차되면서 작가 자신이 보고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단순히 현재의 지속되는 순간의 연결들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시계 바늘이 정해진 지점들을 반복하여 통과하는 경험들처럼 겹쳐져 있는 것이며 덩어리의 단면이 전체 체적을 지시하듯 현재라는 순간으로 압축된 ‘수 많은 다른 나’들의 경험한 기억 전체에 대한 한 단면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원영 작가에게 있어서는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도, 파도 치는 바다 물결의 흐름도 수 없이 반복되는 혹은 겹쳐져 있는 ‘수 많은 다른 나’들의 같은 순간들이자 같으면서도 다른 기억들의 현재일 뿐인 것이다. 그 기억들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기억된 ‘수 많은 다른 나’의 기억에 의해 보는 것이며 몸 자체가 보는 것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특정한 무엇을 그려내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그 경험을 이제 그의 작업에서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는 몸은 하나의 인식판으로 눈의 망막처럼 현재의 세계와 사물 담는 수용체이자 과거의 수많은 시각 기록이 상호작용하는 인터페이스와 같은 한 지점이자 경계면이고 자신 몸안의 DNA를 기록한 ‘수 많은 다른 나’의 경험을 만나는 장소가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예술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자각한 새로운 인식의 기반 위에서 그 경험들을 확인하는 행위 자체이며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 전체일 것이다. 이승훈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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