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적 양가적 의미로 읽혀지는 점에 대하여, 그리고 그
연결과 연쇄가 갖는 다층적 의미에 대하여
변경희 작가의 작업은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으로 끝난다. 이번
전시 주제 역시 “점에서 점으로”이다. 작가는 그의 작가노트에서 “점에서 세계가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점이라는 것은 “시작이자 끝이며, 생성과 소멸의 순간이 겹쳐지는 찰나다”라고 작가의 주제 의식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면서 작가에게 점이라는 것은 “단순한
도형이 아니라, 삶과 존재에 대한 응축된 언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언급을 보면 작가의 작업은 점에 대한 사유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고 그 결과 점에 대한 통찰적 시각을
회화 작업에 담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점을 도형과 같은 일종의 조형 요소로 보기
보다는 점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여러 시각적 기표들이 함의하게 되는 다층적 의미들을 자신의 작업 안에 끌어들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사실 점이라는 것은 ‘0’이나 ‘無’처럼 모순의 언어이자 표시 불가능한 기표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제로’ 상태라는 것,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일정 부분 상상할 수 있겠으나 그 정확한 상태를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개념적으로 상정해 놓을 수 있겠으나 인간에게 있어서 아무 것도 없는 물리적 상태를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디지털적 개념에서 보면 ‘0’이라는 것은 ‘無’, 다시
말해 ‘없음’과 ‘비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기에 그 대칭적 위치에 있는 ‘1’이라는 것은
‘有’ 혹은 ‘있음’을 의미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표시하는 기표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기표가 상징하는 의미층을 읽어내는 것은 일견
단순해 보일 수도 있으나 그 심층적 의미는 “0”이 의미하는 것 못지 않게 난해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변경희 작가가 “삶과 존재에 대한 응축된 언어”라고 말하면서 작업 내에서 조형적 기표로 사용하고 있는 ‘점’은 개념상 모순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고 양가적이거나 다층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으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1’이라는 기표는 ‘있음’,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 뿐만 아니라 ‘0’이라는 기표, 즉 ‘없음’, ‘부재함’의 대칭적 위치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환기시키게 되고 동시에 ‘1’과
‘0’, 그리고 ‘1’과 연속되는 또 다른 ‘1’과의 관계 등 수많은 연산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점이라는 형식”은 “인간 개체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며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고 하면서 이는 자신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언급은
작업에서 표시되는 점은 있음, 존재함에 대한 기표적 형식임을 전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기표가
단독적으로만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점과 관계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텍스트로서 컨텍스트와의 관계, 즉
타자적 위치들과 어떻게 관계하고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에 따라 ‘있다’라고
말하고,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점검하도록
만든다는 점을 암시한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존재에 대한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그러나 이 뿐만 아니라 천장을 날아다니는 하나의 점과 같은 파리에서
영감을 받아 ‘데카르트 좌표계’, 다시 말해 기하학적 공간과
수학적 연산을 연결시킨 체계를 발명한 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사유한다는 것을 하나의 점으로 치환하여
생각해 보면 데카르트의 좌표계는 ‘논리적 연산 체계’, ‘사유
체계’를 ‘상징적 기표 체계’ 혹은 ‘물리적 공간 체계’와
연결시킨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사유라는 행위를 공간과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는
예는 역사적으로도 자주 발견되고 있다. 중세 고딕 건축양식이 신 중심의 수직적 체계와 사유를 상징하고
르네상스 시대에 발명된 원근법이 소실점이 인간의 눈 높이이자 인간 중심의 시각 시대의 징후가 되었던 것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변경희 작가는 다양한 사유를 공간으로 옮겨내는 작업을 해왔음을 보게 된다. 작업을 살펴보면 하나하나 수많은 점들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 점들은 원을 이루고 공간을 만들며 우주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인간 내면의 알 수 없는 마음 속 심층까지 형상화 하기도 한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그려내는
점들이 어떤 특정한 지시적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기 보다는 다층적 층위에서 사유의 공간 혹은 존재의 깊이에 대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점과 점, 점과 배경이 관계와
연결을 보여주는 가운데 결국 그 전체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흐름, 사유의 흐름에 대해 직시할 수 있는
시각적 토대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양자론적 관점에서 보면 물리적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의
99.9999%가 빈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극히 미미한 원자핵으로 지칭되는 지점과
전자라는 지점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관계하는가에 따라 수많은 물질이 탄생하고 공간을 점유하게 되는데 이것이 ‘존재한다’라고 언급되는 수많은 사물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변경희 작가의 작업은 그 실상을 가시화 한 작업이자 사물과 세계의
본질을 그려낸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변경희 작가의 작업에는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과 작가의 사유 방식까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점을 하나하나 찍듯이 작업하는
과정이 수행적이라는 점에서 보면 작가의 작업에는 사유의 흐름과 과정까지 담겨 있기에 이 역시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작가 자신의 작업 과정에 대해 언급하며 “매일
점을 찍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마치 심장 박동처럼 느껴졌다. 점을 찍는 행위 하나하나가
본인 삶의 리듬이 되었고 감정의 진폭이 되었다”라는 부분을 서술한 바 있다. 작가의 작업에는 수많은 현전의 순간들이 담겨 있는 것이며 대상과 상호작용 가운데 감각되는 대상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감각하는 감각 주체에 대한 자각의 순간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업에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판단이 담겨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회화 공간인 그곳에는 그 수많은 질문에 대한 되새김질 같은 점과 유사한 짧은 반응들이
점철되어 축적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점으로 드러나게 되는 그 짧은
반응했던 순간들을 되돌아 보면서 인간의 심층 속으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저 무한한 우주의 끝까지 다가가 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짧은 순간 날아가버리는 자각의 순간들은 매번 다시 또 다른 자각의 지점으로 대체되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 순간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 덧씌우기도 하며 존재에 대해, 삶에 대해
통찰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 질문과 답은 끝이 없으며 결론도 없을 수 있겠으나 작가는 작업을 통해
그 사유의 지점들을 회화 공간 위에 물리적 좌표로 가시화 해내는 작업을 반복하는 가운데 데카르트가 꿈꿨던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살아 있다는 것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점으로 대신하여 발화하면서 말이다.
이승훈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