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 Hurjin

Text: Artist Note

1993 [기타자료] 부패한 익명성의 세계를 해부하기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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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진
작성일 2024-06-21
조회 24

부패한 익명성의 세계를 해부하기 위하여 

이 종 숭 (미술평론가) 

1.들어가는 말 

우리 눈은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잘 보지 못한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 도 잘 보지 못한다. 그건 우리의 눈이 노안이거나 근시라서가 아닌게 분명하다. 우 리에게 세상과 인간의 참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관습과 체 제의 굴레에 어쩔 수 없이, 혹은 탐욕스럽게 합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참모습을 애 써 외면한다고 말하는 편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광범위하게 유포된 후기산업 사회의 물신주의적 욕망은 예술 나름의 명확한 행보를 어렵게 만든다. 그것은 예술을 현실의 삶과 풍경 속으로 끌어들여 존재와의 교감을 신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내는 척 한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예 술은 알게 모르게 언제나 자본주의의 속도가 만들어내는 그 광포한 관성에 실려 일 체의 의사소통과는 교감을 거부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의 정면과 배면에서 이 루어지는 모든 양상의 진행은 과잉된 속도감과 관성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잉 은 정당한 의사소통의 통로를 차단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중의 커뮤니케이 션을 담당하고 있는 매스컴 또한 과잉한 정보를 분류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반(反)커뮤니케이션이라는 불우한 현상을 만들어낸다. 결국 과잉이 문제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과잉, 예술의 과잉, 표현의 과잉, 의식의 과 잉, 이념의 과잉 등등... 이러한 과잉은 결국 정당한 의사소통의 통로를 안이하게 발전과 문화라는 미명하에 방해하는 요소이다. 이렇게 한편으로 과잉이 문제가 될 때, 다른 한 편에서는 결여가 예술 나름의 명확한 행보를 어렵게 만드는 문제점으 로 제기된다. 예술사의 발전은 전시대의 예술적 성취가 다음 세대의 예술인들에게 힘겹게 넘어 서지 않으면 안되는 험난한 언덕으로 제시될 때 이루어진다. 물론 거목의 그늘 밑에 선 어떠한 식물도 자라나지 못하겠지만, 전시대의 예술적 성취가 음울한 그늘로서 가 아니라, 기대고 비벼댈 수 있으며 나아가 극복될 수 있는 범례로서 작용할 때 다 음 세대의 예술적 성취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채 이룩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이것은 철저한 결여로 나타난다철저한 과잉과 철저한 결여, 이러한 이중고 속에서, 또 현실에의 몸담음과 현실의 한계넘기 사이에서 힘겨운 몸짓을 계속하고 있는 젊은 작가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이 시대의 넉넉한 활력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2. 원심력과 구심력의 변증법 

88년 「默示」 시리즈로 시작된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90년대의 「流轉」 시리 즈에 이르기까지 회화의 형식과 내용에서 일관된 흐름을 갖추고 있다. 그가 일관된 흐름을 갖고 지켜온 회화적 형식과 내용은 결국 그의 정신적 지향점이 어디를 향하 고 있는가를 잘 일러주고 있다. 작가 자신은 “그 시대의 심층적인 정신상황을 반 영하여 일상적인 것에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문제를 도출하여 현실화시키려는 노 력”을 예술가의 역할로 보고 있다. 또 그는 예술의 세계를 “단순히 대상을 재현 하거나, 조형요소의 유희적인 실험에 그치기 보다는 직간접적으로 시대상황의 근 본문제를 찾아내 제기하고 때로는 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는 지속적인 목적성을 띤 것” 이라고 규정적으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발언은 작가가 표현하고 자 하는 내용에 잘 조응할 수 있는 실험적인 형식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나타날 것 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제까지 발표된 허진의 작품들 속에는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 성스러움과 불경 스러움 등, 이항대립적인 요소들이 서로 혼용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이 점은 그가 이분법적인 정반(正反)대치의 페쇄적인 분할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역사와 실 재, 그리고 대화의 개방성에 대한 욕구가 크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화선지를 구겼다가 펼친다던가, 장지를 바닥에 놓고 물을 부어 그 위에 물감 이나 먹을 뿌리고 흡수성이 강한 종이를 구겨서 덮는 방법을 주로 써왔다. 이때 도 상은 해체된 형태로 나타난다. 또 그는 수묵채색으로 그린 여러 화면들을 조립하여 하나의 화면을 구사하기를 좋아한다. 말하자면 그는 상반되고 이질적인 여러 요소 들을 하나의 조형적 언술로 구축하는 힘이 뛰어나다. 그런가 하면, 얽히고 설켜 떼 어낼래야 떼어낼 수 없는 인간과 역사의 여러 움직임들과 그 의미들을 각각의 화면의 표층으로 떼어내서 해체 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의 이러한 구축과 해체 사이 를 오가는 조형언어는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역사적 정황을 규 정하는데 있어서 그는 그 정황을 다른 역사적 범주들로부터 분리시켜 보지 않고, 오 히려 그것들의 대조적 변수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형태 속에 조립되고 구축되어 잇는 화면들을 통해 그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미래와 과거사이의 순환 체계속에 들어있는 인물군상들을 동시적 시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 그가 동시적 시점에서 역사적 정황들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역 사의 끊임없는 움직임이 드러내는 방대한 에너지의 생성과 비종결성에 끈끈한 탐 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바로 작가의 표현대로 ‘형상의 서술성’이 묵 시적으로 던지는 메시지의 울림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사에 대한 그의 탐구심 은, 모든 것을 분리하고 서로 떨어져 있게 하여 다르게 하려는 힘인 원심력과, 모든 것들을 결합하여 같은 범주 속에 일치시키려는 힘인 구심력 사이의 기묘한 길항관 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3. 부패한 익명성의 세계에 대한 패러디 

이번 전시에서 허진이 보여주고 있는 「다중인간」의 연작물들은 「默示」와 「流 轉」으로 제명된 과거의 작품군들과 형식적, 내용적인 면에서 그 맥을 같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작품상의 변화의 이면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동반되게 마련이다. 아니, 동반된다기 보다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예술 가의 작품세계를 철저하게 바꿔놓는다고 보는 편이 옳은 말일게다. 과거의 그가 다 시점적인 서술, 시제의 동시적 표현법,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원환체계에 근거 한 역사의 순환적 서술성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현재의 그는 좀 더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과 본질, 그리고 그 이미지의 탐구로 되돌아와 있다. 이러한 그의 시각의 변모 와 거기에서 드러나는 도상은 보는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가 과거에 그려왔던 인물의 도상이 다분히 해체된 형식으로 표현되긴 했지만, 대 체로 사실주의적 범주내에서의 변용된 이미지였다. 반면에 이번 전시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인물의 도상은 철저하게 반사실적 관점에서 표현되고 있다. 부조적 질 감을 강조하고 화면의 깊이를 철저하게 배격한채, 인물의 형상을 가장 물질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점이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는 형상들을 물질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화면의 검은 밑 바탕 칠이 윤 곽선처럼 드러나게 꾸미고 있는데, 이것은 화면내의 여러 대상들간의 긴장을 유발 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에 푼 반고체 상태의 종이를 화면의 검정바탕 위에 아교를 먹여 부착시킨 후, 먹 의 번짐효과를 자연스럽게 이용해 그려내고 있는 인체의 형상은 흡사 엑스레이로 투시했을 때, 혹은 네거티브(negative)로 인화된 필름에서 드러나는 그 모습을 연상 시킨다. 허진은 이러한 인체에 대한 충격적 해석을 선적인 묘사의 거부와 화면내 의 공간구성의 제한, 그리고 이와 함께 병행되는 제한된 색채영역의 발현을 통해 실현하고 있다. 충격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인체는 부패의 이미지를 나타내며, 그 부조적 질감을 통 해 다분히 후각적 이미지가 환기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이며 동시에 가장 강한 환기력을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허 진의 작품들의 부패에 대한 시각적 반성이 후각적으로 음미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지나친 가지각적 현상의 부각이라고 반박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특히 합리적 인 식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라면 이러한 지각은 극히 비합리적이며 인식의 미성숙 단 계로 치부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입장에서 그린다는 행위가 인간의 정신활동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우리 의 입장에서도 그 이미지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부여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해 결해줄 수 있는 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이다. 감상에 있어서 상상력 의 발휘는 현실 원칙과 유리된 비현실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지 않 은 작가의 정신이 움직여간 원초적인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을 우리에 게 부여해주는 것이다. 이 점은 “실제는 오직 예술작품에서 개별적으로 표현된 직 관적 경험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베르그송(Bergson)의 전언과도 일치하는 것 이기도 한다. 어떤 이미지는 강력한 자력을 형성해서 작가들로 하여금 그 이미지를 확산하고 변 용하게끔 하는 힘을 갖는다. 70년대와 80년대의 문학에서 번진 ‘풀’의 이미지가 그러했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는 허진의 ‘다중인간’에 나타난 인물 형상 도 어쩌면 그러한 강력한 자력을 형성할 수 있는 이미지를 갖추고 있는 지도 모른 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군과 압도적인 반문명의 세상으로부터 그물질 해낸 허진의 도상학적 이미지만큼이나 현재의 상황을 잘 읽어내게 해주는 도상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4. 맺는 말을 대신하여 한 개인에게 이미 길들어져 있는 조형적 사고는 아무리 애써도 헌옷을 새 옷으로 갈 아입듯이 쉽게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상 당 부분 바꿔보려고 애쓴 흔적이 무던히도 보이건만,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 에 형상들을 화면내에서 대칭적이거나 비례적으로 구성하거나, 그러한 구성을 통 해 서술성을 표출하고 싶은 욕망의 드러남이 과거의 작품세계와 변별될 수 없는 점 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몸담음과 한계 넘기라는 의식을 동시에 치러내야만 하는 젊 은 작가의 힘겨운 작업은 담아내고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은 법일게다. 이 시계와 인 간은 어둠이지만, 그것들을 어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작가의 행위는 이세상 과 인간이 곧 어둠만은 아니라는 지혜로운 인식에 다다르게 해준다. 서술성에 지나 치게 의존하다보면 화면의 구성이 산만하다는 느낌을 줄 위험이 있는 것이 사실이 나, 그의 서술성이 동시대인들의 시대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 서 일단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어쩌면 허진의 작품세계는 아직 비관주의의 독소가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날카로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부패한 익명의 시체들로 가득차있고, 그들로부터 풍기는 역겨운 냄새를 그의 후각이 참아내기 힘들었는지 도 모른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병든 이 세상의 익명성에 대한 불길한 해학으로 나 타난다. 그래서 우리가 허진이라는 작가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부패한 익명성의 세계를 해부하는 외과의술적 실재(reality)만이 아니라, 이 병든 세상과 같 이 아파하며 그것을 껴안아주려는 이상(ideal)으로의 기댐이다. 실재와 이상의 합일 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여러 가지 극단의 과잉된 현실적 욕망과 방향성을 균형잡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세대가 얻은 하나의 교훈이자 지 혜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 시인의 전언대로 “욕망 앞에서의 지혜란 불 앞에서의 얼음”에 불과 할 지도 모른다. 이런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외람된 생각 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아름답게’ 라는 부사의 구사를 즐겨 하는 작가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그림을 던져놓고 내내 털털 웃어대는 그런 배짱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허진이라는 젊은 작가의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모 색에 거는 우리의 기대가 더욱 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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