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삶의 모습을 넘어, 새로운 모색을 향하여
박 일 호 (미술평론가)
1 우리는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 똑같은 스타일의 기성복, 획일화된 형태로 제시되는 먹 을것과 마실것들에 익숙해져 있다. 또한 우리는 ‘질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구속하 는 사회문화적 규범들에 길들여져 있다.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이미지들과 기호들의 홍수 속에서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사고의 반복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만연된 사회문화적 병폐나 부조리들에 대해 그저 그렇다 생각하고 눈감아 버리 려 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무료해 하기도 하고, 그것들이 우리를 구속하는 것으로 느끼고 그것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상실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기 도 하며, 그것들에 반항하고 싶어하기도 한다. 허진의 예술적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 한다. 허진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사회 문화적 규범이나 제도들이 무언의 압력 이나 폭력으로 다가옴을 느끼고 표출하고자 한다. 우리사회의 산업화 서구화가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말살하고, 우리를 획일화된 삶의 굴레속에 가두고자함을 드러내고자 한 다. 만연된 사회문화적 병폐와 부조리들로 인해 일그러진 우리의 삶의 모습들을 솔직하 게 드러내고자 한다. 즉 허진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것들에 의해 우리가 억압되 는 상황을 드러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내면의 충동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이러한 허진의 예술적 작업에는 권력과 자본에 대한 숭배와 그것들의 횡포 속에서 상실 되어 가는 인간성에 대한 향수가 깔려있다.
2 허진의 작품들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우리를 억압하는 보이지 않는 힘 - 권력이 나 제도적 힘, 냉혹한 자본주의적 경제논리 등과 같은 - 에 대한 묘사가 우리를 둘러싸 고 있는 움켜쥔 손, 우리를 유혹하는 상품들의 이미지, 총. 칼 등의 폭력적 이미지로 묘 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우리 삶의 부조리한 모습들이 서로 상반된 이 미지들 - 웃는 얼굴의 뒷면에서 배어나오는 고뇌라든가 서구적 이미지와 그것과 융합 되기 힘든 한자(문화)의 병치 등과 같은 -을 통해 암시되기도 한다. 세계화라는 미명 아 래 우리의 감성을 말살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상품화 전략에 대한 비판도 있고, 자연 생 태계의 파괴라는 부산물을 수반하는 문명의 뒷모습에 대한 고발도 있다. 이것들 속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초상과 절규 섞인 표정, 어두움에 가리워진 눈을 갖고 살아가고 있음을 표출하기도 하고,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우리 내면의 충동을 무언가를 향해 달려나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들로부터 우리가 결코 벗 어날 수 없다는 또 다른 생각을 뒤엉켜진 군상들의 모습 속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허진의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시대에 던져진 하나의 물음 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성적 합리적 사고, 그를 근거로 한 과학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과 연 우리의 총체적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고 볼 수 있는가 ? 합리성과 능률이라는 잣대만 으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계산된 삶, 그리고 그것들 속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들이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우리는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와질 수는 없을까? 허진은 그의 작품 속의 이야기들을 통 해 이러한 물음들을 같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모습들에 너 무 익숙해져 있는 우리를 일깨우려 하고 있다. 필자는 허진의 이러한 의도에 주목하고 그 의 작품들을 바라본다면, 그것들이 허구가 아닌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며, 설득력 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필자는 허진의 이러한 의도가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이라는 측면도 가짐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감정과 충동에 따른 자연적 삶을 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이성의 합리적 사고를 통해 억제하려 하기도 한다. 우리는 사회문화적 규범이나 체제에 안주하고 싶어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러한 삶 의 정체 속에 안주하기보다는 변화를 추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양면적 심성과 태 도를 갖고 우리 삶을 이루어 나간다. 우리는 그 어느 한쪽 극단을 향해 치닫고 그것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러한 상반적 태도들과 심성들이 단순한 대립으로 그치지 않고 조화를 이룸으로써, 지금의 우리와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다. 필자는 허진의 작품들 속에서 보이 는 모순된 삶의 모습이나 그것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들이 이런 맥락으로 읽혀져 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의 작품들 속의 모순이나 갈등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불만 등이 보 다 발전된 미래를 모색하는 계기들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일례로, 필자는 허진의 뒤 엉켜진 군상작품에서 나타나는 지금의 틀을 깨고 자유롭고 싶어하는 모습과 결코 자유로 와질 수 없다는 모습의 병치가 단순한 허탈감이나 체념이기보다는 보다 나은 미래의 모색 을 위한 몸부림인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3 허진의 작품 속의 줄거리들은 그의 창작방법과 일치를 보이면서 더움 강한 설득력을 드 러낸다. 우선 그것은 변형된 캔버스에 의한 작품에서 나타난다. 몇몇 작품에서 허진은 변 형된 캔버스들에 작업을 하고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캔버스 가 작가의 창작영역을 구속하는 특이라는 점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는 의미 를 갖는다. 그리고 재구성한 화면들끼리 부딪치면서 그 자체로부터 이루어내는 새로운 효 과들이라는 측면도 갖는다. 허진은 이러한 시도를 통해 고정된 틀 속에 갇혀 무언가를 이 루어내고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예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분할화면 들이 연출하는 그 자체의 분위기를 통해서는 예술이 보여지는 것 이상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가격파괴” 라는 제목으로 6호 크기의 작품들 50여개를 배열한 작품도 주목해 볼 만 하다. 여기의 분할화면들은 앞의 것들과 약간 성격 을 달리한다. 필자는 이 작품이 우리 스스로가 분할화면들을 통해 전체적 의미를 조립해 내길 제안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그것을 통해) 예술이란 완성된 모습으로 우리 앞 에 제시되고 우리를 수동적이고 고정적인 시각으로 이끌어나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싶다. 여기에 붙은 “가격파괴” 라는 작품명 또한 시 사적이다. 여기서는 현대의 상업주의 문화로 인해 순수예술과 상품화라는 상반된 명제들 속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는 우리시대 예술의 모습이 풍자적으로 나타나 있다. 작품에 담긴 작가의 自嘲的이고 冷笑的인 태도를 통해 우리는 예술의 상품화라는 시대적 현상들 속에 서 예술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만 할까? 를 묻는 젊은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필자 는 허진의 이러한 시도들이 모두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변화의 모색이라 받아들이고 싶다. 그리고 이런 맥락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몇 가지 다른 형식적 시도들을 덧붙이려 한다. 이 것은 우선 허진이 전부터 시도해온 고정된 형상관념의 탈피에서 찾아질 수 있다. 불규칙한 형태들과 X레이사진에서 차용한 이미지 속에서 느껴지는 인물의 이미지, 잡지 속에서 차 용한 다양한 이미지들의 꼴라쥬 기법을 통한 구성, 허진은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동양화라 는 전통적인 또 하나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예술적 형상들이 삶의 모습을 어 느 정도까지 설득력 있게 재현할 수 있을까? 라는 과제를 스스로의 이러한 실험을 통해 드 러내려 하고 있다. 우리는 허진의 작품에서 보이는 불규칙한 형태들을 표정이 담긴 인물의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X레이 사진의 이미지를 통해서는 사실적인 모습에서 보다 더 강렬하고 우울한 우리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도 있다. 이렇듯 허진의 작품에서 보이는 일련의 형상적 실험은 전통적 양식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시각적 신선함과 강 한 설득력을 드러낸다. 그렇지만 필자는 허진의 이러한 시도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 간의 어울림이나 조화라는 점에서 조금은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는 지적도 하고 싶다. 그리고 이것이 이 작가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하고 싶다.
4
미술이 삶의 리얼리티를 드러내어 잠자던 우리의 감성과 이성을 일깨우고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 할 때, 필자는 허진의 작품들에서 그러한 기대를 해 볼 수 있으
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허진의 작품들이 독백이나 허구로 끝나버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 우리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이 왕왕거리고 메아리침을 듣는
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에 공감을 한다. 그리고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난 후에 남는 후련함
을 갖게 된다. 작가의 역할은 여기서 끝을 맺는다. 나머지 삶의 변화라는 과제는 우리의 몫
이다. 그것은 후련함을 간직하고 전시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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