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 Hurjin

Text: Artist Note

1999 [전시평문] 부조리로부터의 회화, 혹은 부조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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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진
작성일 202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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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로부터의 회화, 혹은 부조리한 회화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 교수)

 1. 허진의 시대, 그 문화적 충격 허진 회화의 적실한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그것의 모티브뿐 아니라, 그 ‘방식’까지도 동시 대가 작가의 감관에 가한 일련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즉, 시대와 사 회, 그리고 문화는 작가에게 사명감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스타일까지, 그려야 할 소재 뿐 아 니라, 다루는 방식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대부분의 경우 개성은 개인에게 가해진 문화적 충격을 통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자신의 저서 <개성, Personality>에서 고든 얼포드(Gorden Allport) 교수가 말한다. 문화결정론을 따르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더라도, 동시대와 문화적 충격 (혹은 충격적 문화)을 누락시키면서 허진의 회화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므로, 작가 의 세계에서는 이 글쓰기의 바로 12시간 전에도 23명의 무죄한 아이들이 터무니 없이 소사했 고, 이로부터 다시 150여 시간 전에는 지구촌의 아이들을 위한다는 마이클 잭슨의 버라이어티 쇼가 있었으며, (다시 200여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60억의 회화가 정치 로비에 투여되고 지중 해의 로댕(A.Rodin)이 급기야는 서울로 침투했다는, 이른바 진정으로 문화적(?)인 사건들이 중 요하게 언급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미증유의 부조리, ‘빨리빨리’ 증후군, 스팩타클, 부패재벌과 자본, 정체감을 확인사살하 자는 세계화.... 회고하건대, 작가의 청년기는-우리의 것이기도 한- 잔혹한 5월로 문을 열었 고, 가능한 모든 날조가 동원됐었던 6.29로 마감됐다. 우리에게 문화란 늘상 그런 것이었다! 어 두운 거짓과 회유, 속이고 속는 순환, 타락한 정치사, 몰염치한 자본과 식객들, 그리고 무전유 죄의 지존파와 유전무죄의 밍크코트 로비, 삼풍과 성수대교, 대구와 아현동 폭팔.... 하긴, 충 격도 페니실린 효과처럼 쉽게 익숙해지는 것이어서 이미 일상으로 안착된 지 오래긴 하지만. 절망은 거짓된 치유과정에서 더 극적인데, 한 때 자신을 옭아맸던 사회로 복귀한 노해 씨는 자신이 어느 순간 서태지의 정신적 후원자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언젠가 민중을 앞에 내세웠 던 이름들은 오늘날 각종의 수상자 리스트를 장식한다.(하긴, 비엔날레도 우리에겐 치유자 처 방이었다) 삭발이 줄을 잇곤 했지만, 머리가 채 자라기도 전에 여의도로 기어 들어가곤 했던 것 과 같은 문맥이다. 뻔뻔스러움, 혹은 후안무치함, 그 의미가 관대하게 완충된다하더라도 최소 한 견디기 힘든 혼돈인 그것들로부터 하나의 태도가 촉발되어 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의 유일한 위안은 찬호와 세리로 이어지는 체육사라고 고백하는 것. 차라리 ‘81 국풍과 ‘88 올 림픽의 성공만을 환기하는 것이 건강을 위해 유익할 것이라는. 어쩌면, 충격을 맞는 이같은 태 도가 충격 자체보다 더 본질인데, 적어도 허진의 회화는 그렇다고 말한다.

 2. 해체가 아니라, ‘출구 없는 누적’이다. 나는 허진의 개별성의 골간인 ‘허진의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사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불어 언급해 온 것과 진 배 없다. 그것은 허진의 회화에 관해 이미 이종숭 이 ‘인간과 역사의 운동들을 화면의 표층으로 떼어내서 해체하는 것’으로 서술했고(93), 다시 김복영이 ‘문자 그대로 해체주의적 방식’으로 명명했던(98), 즉 허진 읽기에 상습적 으로 등재됐던 해체적 관점에 대한 반론에 관계된 것이다. 현상학의 제한된 관점 하에서라면, 허진의 이미지들이 해체를 발호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의 이미지들이 거의 언제나 조립과 분할을 통해 구성되고, 그 각각에서 상호무관한 이항대립이 부단히 목격된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간과되었을)한 고려를 통해 이 같은 해체의 독해와 다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결론을 앞세우자면, 허진의 회화는 현실의 해체적 재구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재 현에 더 가깝다. 이해를 위해 우선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는 애시당초 해체가 출범이자 유일 한 현실이어 왔다는 점이 환기되어야 한다. 보라. 왕조의 몰락으로부터 제국식민 시대를 거 쳐 신탁 통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란으로부터 IMF에 이르기까지 정체감의 부재와 파 편화된 역사의식, 맥락 부재의 사건들과 글로벌리즘 등, 이른 바 해체의 각종 증후들은 이 미 우리에게 담론이 아니라 현실이었고, 실존의 조건이었다. 것이었다. 아픔의 공감이자 고발이었다. 그러나, 허진의 이미지들은 아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려하고, 고발자의 비장한 언어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수사적이다. 아픔이되 화려한 아픔이고, 고발하는 동안에도 눈은 즐거 워야 한다는 식의 고발이랄까. 당시, 작가는 또 분노니 갈증이니 하는 단어들을 화제로 삼곤 했는데, 격앙과 분노를 표방하기에는 화면의 전후좌우가 너무 정연하고, 과도한 이미지들 은 갈증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과식의 거북스러운 느낌에 더 가까왔다. 이를테면, 허 진의 아픔은 수려한 아픔이고 눈물없는 아픔이었고, 고발이더라도 가장 부조리한 고발이자 송사없는 고발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두는 의미와 무관한 통사론의 남발에 불과한가? 구문 론의 부적절한 구사며,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미숙한 표류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허진의 회화는 현실에 대한 조형적 조작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해체인 현실 의 충실한 독해자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예를 들어 보자. 특히, 작가의 95년 어간의 작품들은 삼성 T.V. <개벽>과 현대차 <마르샤>를 말하고 싶어했다. 재주는 곰이(몰매맞는 복서가) 넘고, 돈은 스폰서가 챙기는 식의, 아니면 ‘마이다스의 손’ 이라는 헐리웃의 스팩타클의 경제학, 보스니아에서 예고된 바 있고 코소보에서 그 정체가 분 명해진, (노엄 촘스키를 빌자면)힘있는 자가 원하는 힘이 작용하는 지구촌의 21세기적 지정학 을 발언하고 싶어했다. 자명하게도, 작가의 의도는 동시대의 실존 조건을 추적하자는 것이었 다. 아픔의 공감이자 고발이었다. 그러나, 허진의 이미지들은 아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려 하고, 고발자의 비장한 언어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수사적이다. 아픔이되 화려한 아픔이고, 고 발하는 동안에도 눈은 즐거워야 한다는 식의 고발이랄까. 당시, 작가는 또 분노니 갈증이니 하 는 단어들을 화제로 삼곤 했는데, 격앙과 분노를 표방하기에는 화면의 전후좌우가 너무 정연 하고, 과도한 이미지들은 갈증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과식의 거북스러운 느낌에 더 가까 왔다. 이를테면, 허진의 아픔은 수려한 아픔이고 눈물없는 아픔이었고, 고발이더라도 가장 부 조리한 고발이자 송사없는 고발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두는 의미와 무관한 통사론의 남발에 불과한가? 구문론의 부적절한 구사며,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미숙한 표류라는 말인가? 그렇기는 커녕, 가장 타당한 구문론이자 시니피에/시니피앙의 착실한 일치라는게 나의 독해 다. 근거는 간단하지만 자명한데, 실제로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의미론과 통사론의 유유자적 한 표류 안에서 모든 것은 이중, 삼중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문해 보자. 우리의 사회에 아픔 이 있긴 있는가? 그러나, 부조리하고 뻔뻔스러운 아픔이 있을 뿐이다. 쇼핑과 식욕에 장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만 작용하는 아픔. 고발? 그러나 역시 피래미들-혹은 날개쭉 지들-만 고발당한다. 갈증은 GNP와 주가지수의 상승과 환호 속으로 은폐되고, 분노는 미학 의 게토 안에서만 (그것도) 산발적으로만 다루어진다. 우리의 사회학은 언제나 충분할만큼 윤 기나고 기름칠 되어 있으므로 아픔도 고발도 다 한가지로 기분좋게 진실로부터 미끄러져 나 갈 뿐이다.  

3. 해학, 부조리로부터의 실소 허진의 회화를 현실에 관한 비판적 담론의 기능으로 간주하려는 시도는 지나치게 소재주 의적 발상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물론, 허진이 권력과 부의 망상에 미쳐버린 동시대에 눈쌀을 찌푸리는 쪽이긴 하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그물망에 걸린 모든 물상들을 적어도 한번 씩은 자신의 화폭에 담으려고 작정한 듯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허진의 사 물들이 지니는 속성만큼이나 그것들을 다루고 배치시키는, 맥락화의 방식이 비중있게 고려 되어야 한다. <익명인간-현대십장생도>는 그 좋은 예일텐데, 여기서는 개와 변기, 플라스틱 폐용기와 분 무기가 장생의 상징들을 대신하고 있다. 영속의 오래된 염원이 덧없는 일상의 소모품들로 대 체된 것이랄까. 흥망을 거듭해 온 인간의 역사가 <동물의 왕국>과 차별 없이 중첩되는 것도 같은 문맥이다. 점점 더 실루엣일 뿐인, 즉 윤곽으로만 허락되는 허진의 인간들은 걷거나 뛰면서 익명의 어딘가를 지향하지만, 그들의 자세는 하나 같이 어정쩡하고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 작가는 여전히 일상과 현재로부터의 탈출을 발화하는가? 아니면, 더러운 플라스틱 용기들로 뒤덮여 가는 지상으로부터의 비상을? 그러나, 탈출과 비상의 주체일 인간의 도상학은 날렵한 대신 차라리 비둔해 보이며, <질주>의 경우에도 동작은 이상할 정도로 느슨하다. 실루엣은 강조 된 윤곽으로 확연히 분할된 경계들 위에서 완만하게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한다. 사실, 허진 의 인간들은 언제고 역설 위에서 상존해 왔고, 그것은 사체와 진배 없이 처리되었었던 과거 에도 마찬가지였다. 생물학적으로만 보자면, 묘사는 틀림없이 미이라의 그것이지만, 그 세 부는 역설(?)로 가득했었다. 사망의 음영이 드리워진 퀭한 눈두덩에 비해 입술은 탐욕스럽게 두툼했고, 피부는 완전히 부패했지만 아랫 배는 여전히 불룩했었다. 당시에도, 빈사의 도상 학 위에서 탐욕이 유희하거나, 장례식 분위기와 삶의 가장 천박한 동기가 공존한다는 역설의 수사학이 지배적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지지 않았고, 탈출과 머무름, 생과 사의 그 어느 쪽도 결정적이지 못 한, 섣불 리 낙관이나 비관을 택할 수도, 희망과 절망의 그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어정쩡함과 머뭇거 림. 이 때, 시선은 불가피하게 부조리의 수사학 그 자체로 향하고, 결과는 (어쩌면 작가조차 도)원치 않는 중립이 파생시키는 실소이리라. 탈출의 욕망과 시체적 무기력함, 화려한 아픔 과 부조리한 고발의 역설이 그렇게 요구했듯이, 지향과 정처 없음의 동시성, 그리고 그 부조 리함으로부터의 실소.... 가장 코믹하게 다루어지는 비극, 혹은 슬프지만 우습게 슬프다는 그 ‘부조리’로부터의 웃음인 실소! 그래, 허진의 회화에서도 동기는 출구 없는 절망이었지만, 종국은 (절규요 통곡 이 아니라) 실소고 불가피한 자조의 실소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기의 훼손인가? 그렇지 않 다. 고발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회화의 고발이 특별검사제의 뒤를 따를 도리는 없으므로. 그 것이 회화의 본질이고, 회화적 고발의 본질이며, 일찌기 꾸르베와 도미에로부터 부단히 확인 되어 온 회화사의 진실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림이 진지하게 사회를 고발하려 든 나머지 어 설프게 대법관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며, 정말로 울게 하려다가 삼류 신파로 전락하는 것이 겠다. 회화는 진지한 판사로서가 아니라, 가장 부조리한 판사로서만 세상을 송사에 부칠 수 있는 것이며, 종국으로는 그 자체의 부조리를 통해서만 조리를 교훈할 수 있다는 말이다. 회 화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대신 가장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아픔을 환기시킬 수 있을 뿐이다. 허진의 이미지 세계가 보여주는 수사적 아픔과 고발, 다소 비둔한 몸매와 어설픈 태도들 이 실토해내는 탈출과 지향의 역설적인 언설들, 코뿔소와 코끼리로 대변되는 부조리하고 우 스꽝스러운 십장생, 장난감 같은 소도구들과 인스턴트 음료캔, 그리고 재구실을 못하는 이 정표에 포위된 정갈한 수묵들로부터 우리가 만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부조리로부터의 실 소’에 다름 아니다. 해학의 한 현대적 활용형으로 간주하고 싶어지는 그것은 하나의 진지함 이 파손되고, 이를 메꿀 다른 진지함이 출범하지 못 한 시대의 불가피한 미학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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