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 익명인간과 모더니즘
오병욱 (동국대학교 교수)
익명인간
허진의 작품은 소란하다. 그의 작품들 속에는 온갖 종류의 물건들과 동식물들, 사 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서로가 일으키는 소란스러움에 묻혀 하나 하나를 세심하게 관찰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들은 마치 TV수상기에서 쏟아져 나 오는 무수한 영상들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상을 준다. 꼬리를 물고 일 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이 뉴스 시간에 보도되어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고 흥분시키 지만, 이해되고 해결되기보다는 뒤따르는 사건들에 밀려 기억에서 사라져 버리고, 사건은 있으나 진실은 없는 것처럼, 사건의 동기도 선악의 구별도 없어져서, 어 떤 일이 일어나도 감내할 만큼 세상사로부터 소외되는 것이 현대적인 삶이다. 따 라서 적극적인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현대인은 늘 수동적이며, 비개성적이며, 피압박적 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허진은 이러한 현대적인 삶의 단면을 심각한 주 제로 삼아왔고, 이 주제를 그만의 독특한 예술적 형식으로 발전시켜왔다. 그가 몇 년간 다루어 온 주된 주제인 익명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한 몰개성적인 현대인의 초상화이다. 그래서 그의 현대인들은 대강의 모습만을 갖추었거나, 그림자처럼 윤 곽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그럼에도 바삐 움직이고, 고통받고 좌절하고, 절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을 억누르는 것은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출구없는 건물에서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이 부초같은 현대인들이 그와는 별무 관계인 다른 대상들과 뒤섞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익명인간-여로 V]에 포착된 것 들을 보자면, 변기, 펫트병, 교통표지판, 난초, 의자, 신발, 코끼리, 사슴, 낙타, 기린 등등으로 상호 관련성이 거의 없다. 허진은 리모콘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옮겨 가면서 보는 것처럼, 전혀 다른 상황과 대상들을 교차시킨다. 그는 이 무작위와 우 연의 만남을 통해, 혹은 무엇인 가에 대한 갈망의 선택과 이미 결정된 우연의 교차 를 통해, 발견된 대상들, 그것들의 본성들을 모두 상실하고, 무성격해 진 대상들을 한 화면에 몰아 놓는다. 그의 작품들은 현대적 영상물들, 혹 가상현실들의 꼴라쥬 이고 몽타쥬인 셈이다. 무작위적인 선택과 그것들의 중첩이라는 허진의 표현 방식은 바로 우리가 세상사 를 겪는 방식과 같다. 진지함이 사라진 우연한 만남들, 허수아비 같은 현대의 군상 들, 자연으로부터 또 역사로부터 도려내어져 기괴하게 보이는 풍경들. 그는 이것 들을 익명인간이라는 주제를 내세워 표현해 왔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더욱 많 이 등장하는 익명동물을 그리게 된 동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아들이 TV 를 보면서 수없이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대하고, 그것들의 이름을 알고, 생태에 대 해서도 아는 것 같지만, 한 번도 그것들을 쓰다듬어 본 적도, 실제로 본 적도 없다 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강아지를 껴안고, 함께 뒹굴고 하는 직접적인 교감보다는 TV수상기를 통해 보고 이해하는 상황, 현실감과 진지함이 결여된 가상 현실이 현 실을 대신하는 본말전도, 명실상부하지 않은 상황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허진은 이러한 상황에 분개하며, 이를 표현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두가, 모든 것 들이 서로에게 소외당하는 현실을, 또 그로 인해 비롯되는 고통과 좌절과 분노를.
모더니즘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고, 역사를 제거하고, 온갖 망상과 개인적인 상상을 제
거하고, 그것 자체만에 집중하는 태도가 모더니스트들의 태도이다. 그래서 대상의
형태와 재질과 색채에 모든 가치를 두는 조형적 태도가 모더니스트들의 것이다. 허
진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대상들은 이러한 모더니스트적인 관점에서 관찰
되고,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신체이야기]에서는 위장, 심장, 신장, 안구와 혀, 자궁
등등이 각각의 도안적인 형태를 갖고 한 점의 작품을 이룬다. 그것들의 유기적 관계
와 중요성들은 모두 제거되고, 하나씩 분리되어 무용지물인 단편들로 재현된다. 그
래서 그것들은 특별한 형태가 그려진 물건, objet가 되고, 이 특별한 물건은 예술작품
이 된다. 20세기 미술사는 이러한 특별한 것을 전세계적으로 교육시켰고, 유행하게
했고, 예술작품으로 유통시켰다. 그래서 그것이 아닌 것은 진부하거나 낙후된 작품
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모더니즘 시각의 일반화, 보편화는 예술의 소통기능
을 저해한다. 무의미를 지고의 상태로 여기는 것은 작가로 하여금 의미의 착상과 발
전, 관객과의 대화를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의미를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필요 없
는 혹처럼 여기는 태도는 작가들의 상상력, 창의력을 저해한다. 작품은 그 전에 제작
되었던 작품들의 요소들을 토대로 해서 제작되어야 더 순수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
양식의 한 점 작품 앞에서 그 의미를 찾아내고, 서로 교환하면서 토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을 단순히 조형에 그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색채나
형태, 재료 등이 잠시 시선을 끌지만 그것으로 전부인 것이다. 모더니즘에서 중요한것은 의미가 아닌 - 가장 중요시해야 할 지도 모르는, 또 모든 예술양식의 모태가
되는 의미 -, 양식적 특성이고, 개인적인 기법이고, 특별한 형태나 색채이며, 이들
의 독자적인 발전이다. 많은 담론들이 모더니즘 작품들 주변에서 형성되었으나, 그
것들은 구조주의, 기호학, 여성주의 등등으로 그 스스로를 위한 것일 뿐, 작품 하나
하나에 깊게 들어가지 못한다. 이들은 작품의 피상적인 관찰 묘사에 그칠 뿐이다.
혹은 밑도 끝도 없이 노장사상을 끌어내거나, 문인화라 서둘러 정의 내려 버리게
하는 부유하는 뿌리 없음이 사실 이 모더니즘 미술양식의 원초적인 한계인 것이다.
허진을 모더니스트라 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과 주변과 사회를 이야기하고 싶어해
왔고, 실제로 잘 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의 소신은 모더니즘 양식들의 규칙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의 외침은 조형들의 절제에 의해서 무음으로 들리며, 그의 끓는
필치도 조형의 형식성 때문에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소외되어 수동적이고 비개성적이고 피압박적인 현대인들이 이루고 있는 사회의 구
조를 그의 그림이 닮았다해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
도, 또 그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그 무심하고 세련된 재현이 정당하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그가 신념을 갖고 있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일
은 여전히 작가의 몫으로 남아있다. 허진은 모더니즘으로부터 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으로부터 (필자에게 양자의 차이는 없다) 벗어나서, 그가 추구해 왔던 주제를 더 날
카롭게 갈고 닦아야 할 기점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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