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향연’으로 지칭되는 작업 행위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하여
민예용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여러 가지 색의 한지를 사용하여 작은 선과 면이 수없이 겹쳐지도록 만듦으로써 시각적 깊이감을 전해주는 여러 추상적 회화 작업들을 선보이게 된다. 작가는 이 작업에 대해 ‘무의미의 향연’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서로 다른 크기와 색을 가진 한지들은 차이를 만들어내고 깊이감 있는 공간은 어떤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에 대해 ‘무의미’라는 말로 의미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아이러니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무의미’라는 말로 수식되고 있는 수없이 반복된 행위의 흔적이 남겨져 있는 공간에 대해 작가는 그것과 대비되는 ‘향연’이라는 말을 접목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점 역시 그의 작업을 감상하는데 있어 특별히 주목해서 볼 필요가 부분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와 관련하여 그의 작가노트에서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은 자아에 대한 표현에서 느끼게 된 안정감과 자아의 인정 과정이 작업의 시발점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어릴 적부터 자아 가운데 자학과 집착이 공존하게 되었던 시간들을 고찰하게 되면서 이로부터 느끼게 되었던 부분들을 작업에 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언급은 작가의 작업 동기에 대한 부분뿐만 아니라 작업을 하는 행위를 통해 일정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작가에게는 작업 초기에 자아를 바라보는 일련의 과정이 고통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아를 바라보게 되면서 혼자되었다는 것은 무한의 공황상태와 같게 느껴졌으며 마치 주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작업 가운데 여러 가지 색과 여러 형태의 한지들을 수없이 덧붙이는 행위를 반복하는 작업을 하게 되면서 작가가 이전에 느껴왔던 고통은 점차 안정감을 찾아가고 자아를 인정하게 되는 경험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 같다. 사실 작가가 작업한 결과물들을 보면 어떤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떤 구체적 사건이나 사물을 지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두는 어쩌면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무의미함의 연속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캔버스 공간을 색과 면으로 채워가는 과정에서, 즉 무의미의 행위가 연속되는 향연과 같은 과정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갖게 되고 공포와 같은 고통이 치유되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인간은 간혹 어떤 외부 대상에 집착하기도 하고 거꾸로 내면 속에 숨어들어가 은폐하거나 자학과 같은 행위를 통해 자기를 부정 하는 모순적 상황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에는 혼돈과 오류가 발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처럼 완벽해야 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들게 될 경우에는 이 모순적 상황은 극대화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무의미의 흔적들을 조형적 세계 안으로 가져와 상징적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가운데 혼돈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그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안정감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민예용 작가의 작업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구체적인 어떤 명확한 것으로 정의하기는 매우 어려운 세계일 것이다. 그런데 작가에게는 공황적 상황으로 느껴졌던 세계를 빈 캔버스와 같은 공간으로 바꾸어 바라보면서 그것을 작업 가운데 마주하게 되었을 때 수동적으로 바라보고 있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일견 무의미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색면들을 사용하여 그 공간을 채워내는 행위를 수행하는 작업을 하게 되자 이 행위가 그 비워져 보이고 공황적 상황으로 보였던 공간을 변모시키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안정적인 어떤 세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작가가 경험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전시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색면으로 캔버스를 반복해서 채우는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작가에게는 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는 행위들이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안정감을 주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고 자기 확인을 해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착을 하거나 자학을 하는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자아가 스스로를 대상화 하는 과정에서 어떤 차이나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그 기준에 과잉 또는 과소 평가가 일어나는 것, 즉 열등감이나 우월감과 같은 기울어진 정서를 갖게 되는 것에 기인하기 때문이라면 작가는 자신의 찾아낸 조형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 차이나 의미를 상쇄시키거나 초월할 수 있는 회화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업, 무의미의 향연이라는 것은 무의미해 보일 수 있는 의미 있는 행위들의 향연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는 이 작업들이 의미와 무의미를 넘어 자기 확인의 방식이 되고 있기 때문이며 안정된 자아를 찾아가는 작가적 방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훈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