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운항 Joo woonhang

Text: Artist Note

[] 2020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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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운항
작성일 2024-02-03
조회 59

의식으로 번안(飜案)되는 원형(原形)세계로의 회화(繪畫) 주운항 작가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근원적 질문을 해 오면서 그것의 원형과 본질을 탐색하는 일련의 작업을 해왔다. 이러한 작업은 그가 오랫동안 지속 해온 회화 작업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형상이라는 지점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그가 이렇게 작업에서 사물의 형상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사물의 본질을 알아가는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주운항 작가의 회화에 있어 형상을 그려내는 작업은 사물을 읽어내는 언어와 같은 수단으로 작동 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것이자 그것을 읽어내는 방법에 대한 탐색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의 초기 작업들을 보면 자연의 형상보다는 인간의 외형을 많이 관찰하고 그것을 그려내 왔다는 점이다. 작가는 아마도 자연의 모든 사물을 관찰하는 것 이상의 세계가 인간의 몸에 있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물론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 안에는 우주처럼 무한한 세계가 담겨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이뿐만 아니라 인간은 세계를 관찰하는 주체이자 관찰대상이 되는 객체가 될 수 있기에 더욱 작가가 인간의 몸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인간의 몸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주적 진리와 질서를 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몸은 관찰되는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주의 진리와 질서를 관찰하고 판단하는 주체임을 작가 스스로 자각 하게 되면서 외부로부터 관찰되는 형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후 인간의 몸 안에 잠재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비가시적 형상의 영역으로까지 전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비가시적 영역은 일견 가시적 대상에 대한 논의인 형상과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모순성은 주운항 작가가 그의 작업을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형상에서 벗어나 상징적이고 직관적인 방식으로 비가시적 영역으로부터의 차별적 형상성을 탐색하게 만들었다. 논리적 모순성이 오히려 그의 작업에 있어서 큰 변화를 일으킨 동인이 된 것이며 시각에 변화를 가져온 촉매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작가가 육안의 눈으로부터의 시각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자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주운항 작가의 작업에서 보게 되는 추상적 화면은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주의 실험의 결과물과는 내용상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에서 형상적인 요소들은 눈으로 관찰될 수 없는 외형 너머의 세계를 읽어가기 위한 시각적 기표로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감각을 환기시키고 이를 전해 주는 매개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운항 작가의 회화를 살펴보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적 요소들은 육안으로 감각되는 세계가 아니라 의식으로 감각되는 세계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작업에서는 바로 이 전면적 의식에 의해 스캔 되듯이 추출된 인간의 내부로부터 감지된 것들로 보이는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망막에 맺히는 세계가 투시적 원근법으로 한 점에 모아지는 것이라면 그의 회화는 의식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하여 온 우주와 세계 모든 곳으로부터 모아지는 우주적 시각의 일부분을 담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가 담겨있다. 작가에게 있어 이 의식이라는 것은 온 우주와 시공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무한한 것일 수밖에 없기에 그에게 있어 ‘보게 된다는 것’, ‘알게 된다는 것’은 이 세계의 총체를 인간의 시각 범주를 넘어 초월적으로 ‘보게 되는 것’이고,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의식으로부터 외부의 세계에 대해 눈으로 보고 관찰하는 것 이상의 것들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감지되는 멈추지 않고 샘솟듯이 흘러나오는 그 무언가에 대해 ‘의식의 샘’이라고 지칭하게 되었을 것이다. 작가에게 이 의식은 우주와 세계를 거울처럼 비춰내는 것이므로 결국 하나의 세계로 읽혀질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그것의 일면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마치 메비우스 띠처럼 내면의 의식은 어느새 외부 세계 그 자체로 환원되는 것을 그 스스로가 작업을 하는 과정 속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해 왔기에 작가는 그것을 그려내고 작업 안에 담아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을 자세히 보면 이 무한의 세계가 일정한 형태로 고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작가는 그의 작품 속에서는 이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흐름의 변화와 무한 반복의 형태를 대리하는 형상의 이미지로 남겨두고자 한 것을 볼 수 있다. 세계의 무한성과 가변성을 평면의 회화에 그대로 가져오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작가는 작업 속에 세계 그 자체가 아닌 그 세계를 읽어갈 수 있는 길을 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결국 마치 디지털 이미지 안에 잠재된 코드를 표기해내듯 상징화된 이미지와 기표들로 화면을 채우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의 원형을 향한 기표로 가득 채운 주운항 작가의 회화는 비가시세계에 대한 안내서이자 가시세계로 번안된 번역서로서 읽혀진다. 그의 작업은 사람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이 비가시적 세계가 늘 밖으로만 향하게 되는 우리 시선을 그 방향만 바꾸게 된다면 감지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새로운 방향을 향해 눈을 뜨게 된다면 세계를 비추고 있는 그 의식의 거울을 통해 아마도 세계의 원형(原形)을 바라보게 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의식의 눈으로부터 세계를 보는 방법을 이렇게 자신의 작업에서 그 길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안내해 주고 있다. 작가가 이렇게 안내자를 자처한 것은 아마도 눈 안으로 들어온 세계는 세계의 일면일 수밖에 없지만 의식은 그 전체 세계를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의식의 주체인 자신까지도 온전히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세 개의 막대나 원형의 형상은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식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길을 향하도록 안내하는 표지판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표지판 주위를 서성이며 시각의 다른 방향을 찾는 일은 이제 관객의 몫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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