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되는 시간과 반사하는 빛
작가 이상은은 오랜 과거부터 ‘시간의 층, 시간의 집적’이라는 주제로 콜라쥬, 회화, 디지털 프린트, 영상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때로는 추상회화로, 때로는 세련된 영상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항상 ‘시간’이라는 평범하고도 심오한 주제로 되돌아오곤 했다. 조형적 실험과 매체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추상적이고 때로는 모호하게 느껴지는 ‘시간성’이라는 주제에 나는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 ‘시간성’이란 작가 자신, 작가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조각을 뜻하는 선과 수많은 관계의 층을 쌓아 흐름과 집적을 만들어내는 끝이 없는 고독한 작업에 정진하는 작가의 모습은 무수히 반복되는 고된 작업에도 빈 터와도 같은 편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인간은 현전하고 지속하는 시간적인 존재이며 그의 시간은 그가 만나고 돌봄으로써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 속의 모든 만남과 상호작용을 통해 그의 삶, 그의 시간을 드러낸다. 그의 시간이란 명백하게 분리된 과거, 현재, 미래로서가 아니라 기억과 직관 그리고 기대라는 인식의 다른 모습들을 통해 현재 이 순간으로 녹아든 시간의 매트릭스다.
공시적 시간과 통시적 공간
시간은 쌓이고 공간은 유유히 흐른다. 역설적인 그의 시간과 공간은 스스로의 삶을 짓는 모습이자 사방에 흩어진 기억과 순간의 파편들을 끌어 모으는 작업이다. 같은 자리에서, 반복적인 행위로 시간의 집적을 보여주는 작가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기보다는 먼지와도 같은 순간들을 쌓아가기로 작정을 한 듯이 보인다. 인생의 시간이란 스스로 열어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근원적인 시간성이란 그 스스로 드러내고 돌봄으로서 모습을 나타낸다.
작가는 관심과 조명의 행위로서 반복적으로 선을 그어낸다. 그어내는 그의 행위 하나 하나가 그에게는 순간과의 만남인 셈이며 그 만남으로 그의 인생에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고, 또 존재할 짧고 긴 시간들을 열어 보인다. 때로는 붓질의 자국과 흘러내림을 그대로 보여주는 회화적인 선들이, 때로는 기계적이고 계산적인 그래픽의 선들이 우연성과 의도, 본능과 계획,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직관과 반응, 그리고 수집이라는 몸과 마음의 행위의 결과로 순간과 만나고 있다. 그 만남이 일어나는 공간은 닫힌 곳이 아니라 열려진 터와 같은 것이다. 심안의 발견과 공감을 동반하는 만남이란 물리적 시간이나 인과관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영상과 회화, 판화의 화면들은 공통적으로 선의 쌓임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공간을 그려낸다. 만남의 순간은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것이며 그 만남들 사이의 관계는 움직이고 변화하는 정신적 흐름이다. 이에 작가의 시간성은 선명한 선으로, 공간성은 유동적인 흐름으로 화면 전반을 가로지르며, 시간성 사이의 간극은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한없이 좁아지고, 또는 한없이 늘어난다. 공간은 정신의 흐름에 따라 끝없이 열려진 것이며 시간은 그의 행위로, 몸짓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지속된다. 디지털 영상과 회화의 화면은 의식에 따라 어디로든지 확장되고 정신의 흐름을 여유롭게 담아내는 충분한 공간이다.
작품에 구현된 시간의 층은 조형적인 구조와 선들의 중첩에 따라 어떤 연속이나 나이테와 같은 역사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시간 개념에 따라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스쳐가는 미세한 순간들의 집합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의 ‘그 때’ 이거나, 빗방울이 떨어지는 ‘바로 이 순간’이거나, 기쁜 소식을 들은 ‘그 순간’과 같이 수많은 ‘그 때’와 수많은 ‘지금’들은 나와 만남으로써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는 무감각한 지금들로 이루어진 균일한 시계의 시간에서 나에게 열리는 실제적이고 선명한 순간들을 끌어 모아 화면을 채운다. 그와 그 순간의 만남들과 상호적 관계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때로는 꿰뚫어 보듯이, 보는 각도에 따라, 또는 의식하는 순간의 절실함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 휘어지고, 중첩되고, 쌓일 수 있다. 보는 위치에 따라 선과 결의 각도가 달라지는 렌티큘러는 내가 그 순간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유기체와 같은 시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수많은 만남과 부딪힘으로 이루어져 여러 겹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은 하나의 겹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시간, 순간’은 동시성과 무한의 암시라는 대극적인 모순을 내포한 유기적인 구조의 시간이다. 작가의 시간은 신체적 행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공간은 정신적인 흐름으로 암시 된다.
조명과 비움
작품 전편을 통해 색과 선은 중요한 조형의 요소이자 언어적 기호이다. 각각의 색은 그 순간 일어나는 감정과 감각의 온도를 드러내고 붓질의 선은 작가가 마주하고 떠올리는 만남의 행위를 나타낸다. 빛 없이는 출현이 있을 수 없다. 작가는 그의 순간을 조명함으로써 의미를 드러내고 조명된 시간의 면들은 각각의 기쁨과 고통, 슬픔과 희열을 색으로써 반사한다. 이 색들이 생생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이 기억과 직관의 색이기 때문이다. 만나는 순간의 시간성은 질량과 구조를 가지지 않는 비움의 개체와 같이 조명된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빛을 받은 물체와 그림자의 공식을 가지지 않는 그 자체의 색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순간이란, 그의 색과 같이, 후회와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추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그 자체로서 우리의 삶 속에 드러난다. 색이 삶의 순간을 반사하는 빛이라면 붓질은 작가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매 순간과 만나는 행위이다. 그의 시간은 당연히 삶 속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불러줌으로써만 나와 만날 수 있고 내 앞에 나타나 지속될 수 있다. 이 순간순간을 붓으로 그어냄으로써 작가의 시간은, 그리고 기억은 내 눈 앞에 현전한다.
작품의 화면은 흡사 아래위나 좌우가 없는 무중력의 공간과도 같다. 어떤 진행의 방향이나 이미지의 출현이 없는 화면에서 유일하게 작가의 현전을 증거 하는 것은 그어진 붓질뿐이다. 반복적인 선들과 선들의 쌓임으로 작가는 그가 쌓아 올린 시간과 관계의 겹을 바라보는 조망자를 넘어서 그 자체가 된다. 붓으로 그어내는 행위는 바로지금의 나와 만나는 행위이자 존재를 소환하는 유일한 흔적이며 붓질 자국은 아득한 깊은 물속과 같은 삶의 공간에서 자신의 현전을 증거 하는 부표이다. 붓을 들어 내리긋는 그의 몸짓은 무겁게 한 땀 한 땀 그의 삶을 그어내고 있고 그의 댓가로 작품의 공간과 시간은 보는 이에 무한한 자유와 비움을 선사한다. 소실점이 없는 그의 화면을 바라보는 이의 몸은 계속해서 우주 끝까지 확장된다.작가의 현전은 한없이 무겁고 그가 보여주는 화면은 한없이 자유롭다. 이때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묵묵히 오색의 선을 그어내는 작가의 모습은 매일 매일의 삶의 편린을 쓰다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2020년 1월 한주연(미술이론박사)
다음글 | 빈터(Void)라는 기표, 혹은 사건 | X | 2024-08-11 | 7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