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숙 Lee Youngsook

Text: Artist Note

[] 2019 전시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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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영숙
작성일 2024-01-06
조회 109

선의 무게, 색의 중첩 Ⅰ. 인간의 형상에 대한 모방은 인간성에 대한 모색과 연결된다. 회화적으로는 누드 크로키가 기본적이다. 이영숙의 미술이 출발하는 지점이다. 일종의 미술로 하는 기초 존재론 같다. 미술사적 경로에 충실한 자세로 탐구하는 방식은 동시대적 상황에서 어느 정도는 망각되고 있는 상태이다. 미술의 사유가 서구에서 시작될 때부터 예술은 현시로 이해되어 왔다. 서구의 예술론에서 시종일관 등장해 온 한 개념이 이러한 이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불충분하나마 모방 혹은 재현이라는 말로 옮겨지는 미메시스가 바로 그것이다. 서구인들의 사유를 창시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두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지점에서는 서로 의견이 같았다. 그들은 예술을 모방, 즉 자연의 모방으로 보았다. 고대의 예술 실천에 이러한 예술 규정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유명한 화가들의 경쟁을 다룬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어떤 이념에 종속되는 실천으로서 미술을 보여준다. 미술의 전형이 존재한다는 태도이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나도 완벽하게 그려내어 새들이 날아와 이를 쪼아 먹으려 할 정도였다. 제욱시스의 이러한 성취는 그의 경쟁자인 파라시오스가 더욱 분발하게 만들었다. 파라시오스는 마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듯 보이는 그림을 그렸고, 이는 제욱시스의 착각을 유도하였다. 제욱시스가 장막을 걷어내려 함으로써 승리는 파라시오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일화가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의 구성이 보여주는 생각은 당시에 예술을 추구할 때 이를 자연의 모방으로 여겼다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지적할 사항은 자연은 존재 혹은 세계 등으로 이해되어야지 풍경화나 산수화의 대상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관계에 대한 관심을 토로했다. 그래서 더욱 미메시스는 새롭게 수용될 수 있다. 재현과 모방은 그 차이에서 이미 가능성을 내포한다. Ⅱ. 이영숙은 관계에 대하여 주목하지만 이른바 니콜라 부리오 류의 관계의 미학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는 언제나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상기하는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세계로 나오고 처음부터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와 동시에 세계로 향하는 길들을 열어야 하는 과제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다. 그 세계는 형상화되어 있고, 정돈되어 있으며, 의미 있는 세계로서, 사람들은 이미 그 세계의 일부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세계의 동반자가 된다. 그리고 세계의 문맥 속에서 편집되고, 세계의 의미들을 이해하며 의도를 갖고 타인들에게 자신을 맞추려 애쓴다. 이 현실 세계를 예술 세계로 재현하는 것이 작업이라는 노동이다. 이렇게 창출된 공간은 작가의 화면에서 중첩과 공백을 반복한다. 마치 존재와 무의 차이와 반복 같다.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 작업으로서 노동은 유사한 것도 등가적인 것도 갖지 않는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과 관계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행동에 해당하는 이 반복은 그 자체로 아마 더욱 비밀스러운 무엇인가에 대해 상응하는 떨림일 것이다. 그것은 더욱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것에 대하여 조응하는 힘으로서 반복, 다시 말해서 그것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작가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의 권력으로서 반향이다. 작가의 화면에는 바로 그런 역설, 즉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반복한다는 명백한 역설이 놓여 있다. 그럼에도 관계 또한 반복을 통해 회복될 수는 없다는 비극적 사실을 망각할 수는 없다. 그 차이는 언제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기어코 재현의 네 얼굴인 동일성, 대립, 유비, 유사성이라는 사중의 뿌리에 종속되면서 차이는 매개된다. 이제까지의 회화적 방법론으로는 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Ⅲ. 모방과 재현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서 이영숙은 어떤 실마리를 찾는다. 부재를 존재하게 하는 기술로서 재현과 인간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상황들을 모방하는 능력은 미메시스로서 동일하지만 동시에 차이를 갖는다. 모방과 형식 부여는 서로를 배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미메시스적 행동에서 이것은 배제의 관계가 아니다. 어떤 타블로에서 인간의 형상이 그려진다면, 이러한 행동은 그러한 형상화 행위를 하도록 계기를 준 어떤 사람과 관련된다. 이때 관계가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형상에 대한, 그 평면에 대한 조형적 형식들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작가는 일종의 본을 하나 마련해두고 있기까지 하다!) 화면에 선으로 그어진 어떤 무언의, 움직이지 않는 인간의 이미지가 있어야만 비로소 조형을 하는 작업자의 산출 작업은 한 형상의 모방으로 여겨진다. 미메시스적 행위가 모델을 그것의 모사와 똑같이 산출해낸다. 재현된 사람이 모범으로, 그리고 선으로 된 형상이 모방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그 둘 사이에 미메시스적 관계가 만들어짐으로써 생겨난다. 현실과 회화의 관계가 성립하는 장소가 바로 화면이다. 그림이 탄생하는 곳! 모델이 모범이 되는 것은 형식을 부여하는 모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면과 선이라는 재료로 하나의 형식이, 즉 재현된 사람을 넘어서는 형식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그 형식이 그 사람에게 어떤 확정된 형식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형식은 모범 없이도 존속한다. 어느 누구도 모델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선과 색으로 된 인물은 한 사람을 나타내고 이어서 화면은 관계로서 세계를 드러낸다. 그 회화 작업은 그것과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형상 레퍼토리에 그 사람의 형상을 더해줌으로써 레퍼토리를 풍부하게 만든다. 즉 그 회화 작업은 관람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인과적으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미친다. 미메시스적 행동을 통해, 단지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존재하는 세계로 진입하는 길이 열린다. 이렇게 작가의 작업은 세계를 다시 한번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Ⅳ. “그런데 아직 사람이 보이나요?” 작가가 물었다. 이 말에는 현재 이영숙이 지향하는 바가 보였다. 어떤 지시적인 작업보다는 자신만의 표현을 찾는 것처럼 들렸다. 예술을 모방으로 보는 관점을 재현론이라 부를 수 있다. 이때 ‘재현’이라는 말은 라틴어 ‘레프라이센타티오’에서 유래했으며 표상 혹은 현시와도 관련된다. 재현론에 따르면, 한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른 사물들에게 어떻게 표상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고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자연의 모방물이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상태를 작가의 예술적 성취가 이룩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발상을 실현하는 중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더 이상 외부 현실이 아니라 내면을 추구하는 회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론의 발상은 다음과 같은 슬로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회화의 관건은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았는가이다. 지식보다 감정! 이러한 강령을 일반화하자면 예술을 표현으로 보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가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작품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작가는 미메시스적 표현론의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레오 톨스토이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에서 그 감정을 새롭게 불러내어 일종의 외적 기호로 표현할 때 비로소 예술은 시작된다.” 작가가 미술의 펀더멘털에 충실하다는 것은 동시대 미술이 잊은 미덕일 수 있다. 회화의 기초인 누드 크로키에서 출발하여 선과 색의 중첩과 반복을 통해서 표현하려는 세계가 등장한다. 이렇게 창출된 화면은 점점 두꺼워지고 있는 중이다!

김병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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