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 전시서문 _ 사이아트 스페
작성자
김유림
작성일
2023-10-19
조회
156
‘비워진 언어’ 혹은 ‘채워진 감각’과 그 영역에 대하여
‘비워진 언어’라는 주제로 시작되는 김유림 작가의 이번 전시에는 어떠한 텍스트나 이미지도 찾아 볼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책들과 책으로부터 파생된 페이퍼 작업이 등장한다. 이 책들은 대부분 한지로 제작되어 있기에 거의 백색에 가까운 한지 특유의 미색의 색감만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작업 중 일부는 한지에 짙은 흑색의 먹이 스며있는 것도 있는데 이 역시 구체적 이미지나 텍스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어떠한 회화적 표현도 생략해 버리고 텍스트와 이미지의 지지체가 되는 지점만을 섬세하게 만들어낸 작업에는 작가가 제시한 주제처럼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고 모두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작가는 “언어를 찾지 못한 감정들은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 언어화 되지 않은 감정, 혹은 언어화 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음 깊은 어느 곳에 쌓이게 되는 것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본디 어떤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컨텍스트의 관계를 읽어내기 마련이고 이 관계로부터 맥락에 맞는 해석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컨텍스트 영역을 극도로 강화하고 텍스트에 해당하는 영역을 비워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텍스트의 영역이 비워져 있으므로 이로 인해 작업에 대해 무한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으나 작가는 컨텍스트 영역을 극도로 강화함으로써 표면 위로 부상하는 텍스트의 지시적 의미가 무엇이든, 혹은 비워진 상태일지라도 그것을 능가하는 컨텍스트의 지위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자신의 작업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컨텍스트가 마치 텍스트의 지위를 성취해낸 것처럼 보이는 김유림 작가의 작업은 헤럴드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때”라는 전시 기획에서 작품 자체보다 개념 설정이나 작업 과정 등 컨텍스트를 중시하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작품은 거의 비워둔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 비워둔 지점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그곳에 정작 표현하고 싶었으나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 깊숙히 있는 것들에 대해 더 깊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미세한 묵언의 웅변을 하는 듯한 김유림 작가의 작업은 그러므로 ‘비워진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나 ‘채워진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책의 형식 안에 담아낸 감각의 언어는 텍스트라는 개념에서는 비워낼 수 밖에 없고 비워진 것처럼 보이지만 감각이라는 개념에서 보게 되면 가득 채워진 것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관객 역시 구체적인 무엇을 읽어내려 하다보면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작업에는 아무것도 쓰여져 있거나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의 눈을 열어 그곳에 스며있는 작가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쏟아놓은 것들, 즉 작가 내면의 느낌과 정서를 느끼고자 한다면 구체적 무엇을 읽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글 뿐만 아니라 예술 작업 역시 맥락과 관계를 읽어낼 때 진정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라면 김유림 작가의 ‘비워진 언어’라고 지칭되는 작업은 비워진 그곳이 아니라 비워진 그곳을 만들어낸 상황과의 관계, 그리고 언어화 할 수 없었던 마음 속 한켠과 그러한 정서를 만들어냈을 상황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가운데 작업을 읽어갈 필요가 있다. 그때 작가의 작업과 그가 공유하고자 하였던 내적 영역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훈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