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性의 경계를 탈주하는 유목적 상상력
최 광 진 (미술평론가, 理美知연구소장)
인간이 동물과 식물 같은 존재들에 비해 우월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이유 중에 하나는 이성(理性)을 지녔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다른 생물과 자연을 외면한 채 오직 인간에게만 중심적인 위치를 부여한 서구 근대의 이성중심주의는 희랍철학에서부터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상의 지배원리가 되어왔다. 개별적이고 다양한 세계의 모습을 이성의 힘으로 경계지우고 굴복시켜 식민화하려는 계몽주의의 야망은 신의 경지를 인간 스스로 도달하겠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한편으로 인간과 자연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처럼 도구적 이성에 의해 억압된 미시세계의 특수한 차이들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인문학과 예술의 사명이 되고 있다.
동양화의 전통에서 출발한 허진의 회화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가 자행한 이성의 폭력을 공격하고, 이성의 힘으로 구획해 놓은 거창한 구획과 경계들을 무너뜨려 탈주시키는 데서 오는 해방감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실 인간과 동물, 식물이라는 이름들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경계를 구획해 놓은 것들이고, 그러한 구분에는 인간의 우월성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는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단지 차이의 세계로 존재하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 호환되는 자연의 유목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망을 꿈꾼다.
이러한 의도는 그의 작품의 구성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인간과 더불어 여러 동물과 식물을 동시에 등장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상식적 관계를 역전시키고 뒤섞어 놓아 복잡한 관계망을 구조화한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모습은 결코 우월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형상들은 작은 단위로 기호화되고 파편화되어 동물이나 식물 안에서 기생하기도 하고, 무중력 상태에서 가벼운 깃털처럼 허공을 떠다니기도 한다. 인간 보다는 오히려 개, 호랑이, 얼룩말, 기린, 사슴 같은 동물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어떤 구체적 상징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일탈과 부정의 즐거움
그의 회화에서 어떤 시각적인 재현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것의 내용과 이야기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제시하면서 어떤 일관된 이야기나 담론을 박탈하고 대상의 의미를 고립시켜 의미론적으로 반재현적인 낯설음을 창출하는 것은 허진 회화의 중요한 전략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가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은 친숙한 사실성에서 오는 발견의 즐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맥락을 벗어나는 데서 오는 ‘일탈과 부정의 즐거움’이다.
이러한 일탈과 부정의 즐거움은 그것을 평면에 배치시키는 방식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조형언어는 고전적 리얼리즘에서처럼 3차원적 원근법이나 모더니즘 회화에서 보이는 평면성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입체파적인 다시점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상의 크기와 위치가 시각적 맥락과 상관없이 마법사가 마술을 부리듯이 대상을 변형시켜 배치한다. 이러한 구성은 시각적 질서가 아니라 마음의 의한 마음의 질서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나 자신의 주관적인 내면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 화면의 구성방식에서 일상적 사물을 통해서 일상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마그리트식의 데페이즈망에 가깝지만, 초현실주의에서처럼 막연한 무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인 아우라가 붓 터치를 통해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의 회화는 양식적으로 무의식에 의존하는 초현실주의와 신체성에 의존하는 표현주의의 틈새에서 자신의 조형언어를 구축하고 있는 듯하다.
마음과 신체의 논리
이러한 그의 회화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체와 마음의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우리의 마음과 신체의 욕망은 이성이나 지성보다 훨씬 자유롭고 보다 다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유목적인 차원이 강하다. 그것은 들뢰즈(Gilles Deleuze)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가 정의한 각종 관습적이고 코드화된 억압으로부터 끝없는 탈주를 꿈꾸고, 모든 표준화의 권력에 저항하며 무작위한 새로운 연결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본능적이고 복합적인 관계망으로서의 세계는 허진의 작품을 읽어내는 중요한 코드가 된다.
이성에 갇힌 신체의 감각과 이미지의 세계를 복원하기 위해 그가 취하는 방식은 먼저 과거에 경험한 어떤 인상적 사건이나 사물을 불러오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들은 그의 기억 속에 잠재적 양태로 존재하는 이미지들이다. 최근 그의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동물들은 2002년 일본을 여행하고 나서부터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당시 그는 일본 나라에 있는 고후쿠지(興福寺)에서 푸른 전원에서 울타리도 없이 동물들이 인간과 하나 되어 어우러져 노니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러한 생태적 이미지에 대한 강한 기억은 그의 관심사를 변화하게 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이전까지 <익명인간> 시리즈를 통해 보여준 허진의 작품은 주로 위선적인 인간을 풍자하는 현실비판적인 작업이었다. 다소 표현적이고 해체적이었던 그의 작품은 2002년 일본 여행에서 얻은 이미지에 의해 보다 긍정적이고 생태적인 작업으로 변모케 되었다.
그의 작업은 자신의 기억 속에 강하게 새겨져 있는 생태적 이미지를 일단 끄집어낸 뒤 그것의 의미를 어느 특정한 맥락에 고정시키지 않고 마음의 미끄러짐을 따라 다소 발생론적인 창발에 손을 맡긴다. 그럼으로써 예키지 않은 구성방식이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이처럼 다소 즉흥적이고 우연에 의존한 구성방식이 정합성을 부여받는 것은 시각의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논리이다. 그는 마음의 논리에 의해 전개되는 운동변화와 이미지의 자율성에 탐닉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서의 이미지들은 어떤 기준이 되는 축이나 중심이 존재하지 않고 상하좌우 횡단하며 가로지르고 뒤섞인다. 생태적 담론을 간직한 그 이미지들은 화면에 그려짐과 동시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감각적인 터치와 창발적 구성에 의해 와해되고 새로운 질서화가 이루어진다. 최근 그의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점(dot)들을 특수한 사실성을 약화시키고 대상을 익명화시켜 초월적 공명을 가능케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형상으로서의 회화 이미지
이러한 방식으로 창출된 그의 회화 이미지는 실체도 허상도 아니면서 실재의 일부가 되는 그 무엇으로 들뢰즈가 말하는 ‘형상’(figure)의 개념과 가깝다. 형상은 구상이나 재현과 달리 어떤 구체적 서술이나 설명을 허락하지 않고, 대상으로부터 고립시켜 오직 신체 감각의 직접성을 통해서만 구현되는 무엇으로 지시할 모델이 없는 이미지이다.
이처럼 허진의 회화는 경험적 재현에서 출발하면서 의미론적인 상징성과 상투적인 서술성을 거부하고 하나의 순수한 ‘형상’으로 귀착되는 과정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러한 ‘형상으로서의 회화 이미지’는 경험과 관념, 구상과 추상, 내재와 초월, 의식과 무의식, 관심과 무관심이라는 인간 이성이 설정한 이분법적 경계를 내파(implosion)시켜 실체와 관념 사이에 또 다른 실재로서 존재하는 이미지의 세계를 복원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는 재현과 달리 어느 특정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동시에,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추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현실을 구성해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미학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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