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를 통한 눈뜨기와 세상 찌르기
-<익명인간>시리즈를 통해 본 허진 회화의 자연 순환관-
김 백 균/중앙대 한국화확과 교수
90년 첫 개인전 이후, 꾸준히 <익명인간>시리즈를 통하여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적 삶에 대한 근원적 반성을 추구했던 허진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인간애, 즉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동안 그의 작업을 이끌어가는 주제는 현대 사회의 과도한 부유이미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배회하는 익명인간이거나, 원시적 삶이그대로 투영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유목동물, 또는 이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연역되어 나오는 사회적 부패, 관습과 체제, 구조적 모순 같은 것들이었다. 그의 회화가 다루는 주제와 소재가 사회 혹은 문명 비판적인 것이며, 그의 정신세계가 지향하는 곳이 비문명적 세계 임에도 불구하고 허진은 여전히 휴머니스트이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 그리고 지식인으로써의 사명감이나 책무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은 그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실의 직시에서 출발한다. 그가 지나온 세월은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정치적 갈등과 노사 문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빈부계층간의 충돌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가 보기에 그의 눈에 보이는 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모순들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허상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진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인식이 만들어낸 사회적 질서 체계를 거부한다. <익명인간>시리즈는 바로 인간의 인식에 대한 부정이다.
허진이 인간의 욕망을 통한 인식을 부정하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유목동물로써의 입장을 지닌 인간상이다. 문명의 탈을 쓴 욕망의 역사를 서술하기 이전의 인간상을 회복하자는 것이며, 인간 역시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로써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여 살아가자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인간에게는 인간관계라는 질서가 부여되며, 이러한 인위적 질서체계가 인간에게 죽음 혹은 죽음의 세계관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익명인간 생체 순환도>로 대변되는 그의 세계관은 다분히 문명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기실 그의 이러한 문명비판적인 생각은 노자와 장자의 자연관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노자는 만물 존재의 원리로써의 ‘도’와 그의 작용으로써 ‘덕’의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만물가치의 척도로써 ‘도덕’의 회복을 주창한다. 이때 ‘도덕’은 유가의 ‘도덕’과는 다르다. 노자의 ‘도덕’은 인간 문명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순환법칙에 부합함으로써 인간의 작위적인 가치가 부여되지 않은 우주순환의 법칙성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의 사상은 ‘자연’과 ‘무위’라는 중심 개념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보편적이며 비교적 확정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인 반면, ‘무위’는 비교적 특수하고, 모호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일종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용될 수 있으며, 반드시 직접적인 대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반면, ‘무위’는 일종의 특수한 행위 방식을 가리키며, 행위 능력을 지닌 행위 주체에 쓰일 수 있으며, 반드시 행위 하는 대상 또는 경우를 나타낸다. ‘자연’은 노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다. 반면 ‘무위’는 그 중심가치를 실현하거나 추구하기 위해 노자가 제시하는 기본 방법 또는 행위의 원칙이다.《노자》의 ‘자연’이란 개념은 자연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일종의 사물의 존재상태를 뜻하므로, ‘자연’이라는 개념 속에 자연계의 정황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노자철학의 관심의 대상은 대자연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생존상태를 지시한다.
허진의 회화에서 그가 그리는 궁극의 세계는 자연으로 회귀한 인간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부귀나 비천의 가치를 잊고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갈등이 사라진 사회, 모순이 극복된 사회가 곧 허진이 유목동물, 유목인간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이상이고 노자의 ‘자연’이 구현된 사회이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이라는 가치의 보편적 의의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외부적인 통치자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자연’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완수되면, 백성들은 모두 내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고 여긴다.(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노자․17장》 노자는 가장 훌륭한 위정자는 백성들에게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은덕을 자랑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다음으로 ‘자연’은 원시적 생활방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간섭 없이 유유자적 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하며 그 근거는 ‘도’에 있다.
조금 길지만 《장자》의 한편을 인용하여 보자.
지고한 덕이 이루어진 시대에 사람들은 거동이 유유자적하며, (마음이)순수하고 욕심이 없었다. 그 당시, 산에는 길이 없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으며, 만물이 무리지어 생겨나고 모두 이웃하며 살았다. 새와 짐승은 떼 지어 살고, 초목은 마음껏 자랐다. 그러므로 새와 짐승을 끈에 매어 노닐 수가 있었고 까치둥지에도 올라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무릇 지고한 덕이 이루어진 시대에는 사람들이 새나 짐승과 함께 살고, 만물과 함께 나란히 모여 있었으니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었겠는가? (나무 위나 혈거생활로 금수와 구별할 수 없는 생활 다른 만물과 다를 바 없는) 마치 무지한 사람 같아서 본래의 참 모습을 떠나지 않았다. 멍청하니 아무 욕망이 없어서 그야말로 소박하다 할 수 있었다. 소박하므로 곧 백성의 자연스런 본성도 온전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인이 나타나게 되자, 애써 인을 행하고 허둥지둥 의를 행해서 온 천하가 비로소 의혹을 품게 되었다. 또 제멋대로 음악을 연주하고 번잡하게 예의를 만들어 천하에 비로소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 그대로의 나무토막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술 단지를 만들겠는가. 자연 그대로의 백옥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규(珪)나 장(璋)을 만들겠는가. 참된 도덕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인의를 취하겠는가. 본래 그대로의 성정(性情)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어찌 예악(禮樂)이 필요 하겠는가. 오색이 문란해지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무늬를 만들겠는가. 오성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육률에 맞추겠는가. 무릇 통나무를 잘라 그릇을 만드는 것은 장인의 죄이며, 도덕을 해쳐 인의를 만든 것은 성인의 잘못이다.
(《馬蹄》)
허진의 회화 <익명인간>시리즈 역시 바로 이러한 세계의 현대적 모습에 다름 아니다. 자연의 원리에 근거하여 순수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허진이 사회를 비판하는 목적이며, 그가 작업을 계속해나가는 원동력이다. 우리가 문명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세계는 박제화 된 자연이며, 우리의 기존 가치관에 의해 질서화 된 세계이다. 허진은 이 질서화 된 세계를 비질서의 눈으로 바라보자고 외친다. 그의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어떠한 입장이나 처지를 떠난 그저 그 상태를 지닌 물상으로써 존재하는 일상의 존재들이다. 변기나 병따개, 핸드폰, 열쇠, 망치 같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하는 물상들을 가치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 물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자물쇠를 여는 열쇠의 가치가 아니라, 그 생긴 그대로의 모습을, 질서가 부여된 가치가 아닌 무질서의 혼돈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가 얻게 될 마음의 평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모습에서 동물은 인위적 가치를 조작하지 않는다. 동물은 주어진 자연의 속성과 본성에 의해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이 조성되지 않는다. 허진은 이것을 유목적 특성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또한 고착화 되지 않고, 토착화 하지 않는 것으로써 무엇이든 고착되는 순간 가치가 발생하고, 인간은 가치라는 욕망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허진의 그림에서 물상들은 무질서 속에 놓인다. 그 무질서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질서화 되지 않은 것을 뜻할 뿐, 그것이 자연의 이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물상들은 수없는 관계 속에 놓이고, 각기 관계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가치로 전환되며 오버랩 되거나 순환한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동양사상의 순환관에 기인함으로써 매우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그의 작업형식이 전통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업은 그동안 우리가 동양적 형식이라고 여겨 왔던 특성들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것은 그의 끊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미 제도화된 맹목적인 가치의 주입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 그동안 반성 없이 받아들였던 동양화의 원리와 법칙, 그리고 그 관념적 이상에 회의를 갖게 된다. 이른바 먹의 정신성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필의 운용과 여백의 포치 같은 이미 제도화된 가치관들이다. 특히 완숙함과 노경(老境)에 대한 지나친 요구는 혈기 왕성한 그가 맹목적으로 따르기에는 너무 형이상학적인 담론에 기인한 것이었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수묵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와 거대담론으로 인해 그는 작업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였고, 그야말로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정체성 담론과 더불어 동양정신의 회귀에 대한 회화작업의 실현이 거론 되고 있었지만, 실제 그림에서 동양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실천의 문제에 직면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막연함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의 안목을 열어주었던 것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동양학 강의였다. 그는 도올선생의 동양학을 들으며 그림이란 것이 그림만 그린다고 그림이 되지 않는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림이 작가의 주관적 인식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작가가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는지 인식의 문제가 우선하며, 그림이란 삶의 총체적 집적을 통한 인식을 투영하는 것이므로 통합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무엇보다도 교양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화의 실천에 있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림이란 자신이 보고 느끼고 인식한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깨달은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동양적 형이상학적 담론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정에 맞는 거침없음과 야성적 방식으로 복잡하고 다단한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가 보는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한 관계들 속에 있으며, 그 복잡하고 다단한 세상에서 통합적인 하나의 원리를 추출할 수 없다는 인식의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인간은 이 현실 사회에서 다중적인 인간으로 보여 질 수밖에 없다. 한 인간은 다수의 상황과 관계를 맺으며, 누군가의 아들로 혹은 아버지로 선생님으로 학생으로, 직장의 상사로 혹은 부하직원으로 복합적이고 다단한 심사를 지닌다. 그는 이러한 한 인간의 다중적 감정을 한 장면으로 포착하여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복합적 감정을 하나의 화면에서 처리하는 조형을 위주로 한 작업을 선보인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매우 서술적이다. 그의 화면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가 보는 현대인의 모습에는 많은 인위적 허상에 속고 속이는 순수한지 못한 인간 사회의 갈등과 모순이 투영되어 있다. 그가 보기에 영상매체가 다양화 될수록, 우리 삶의 주변이 매체에 의해 둘러싸여 질수록 인간의 소통은 단절 되고 인간은 소외된다. 매체는 소통을 위한 것이지만, 소통을 위한 매체가 어떠한 인위적 목적에 이용될 때 소통은 단절 되거나, 혹은 변질된 가치를 낳거나 왜곡된다.
최근 그는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한 대형 작업들을 선보이고 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본 TV 광고 속에 비친 안중근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광고주는 이름난 매판자본이었고, 안중근의 이미지는 매판 자본에 의해 이용됨으로써 매판자본의 이미지를 긍정적 가치로 왜곡시키는데 사용된다.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허진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물론 그 되묻는 질문 속에 답은 있다. 그러나 그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하여 인간의 역사와 문명의 역사와 그 자연 파괴의 역사에 대하여 역설한다. 그는 안중근을 익명으로 돌릴 때, 안창호를 익명으로 돌릴 때, 모든 역사적 인물을 익명으로 돌리고, 모든 가치를 무가치로 돌릴 때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회복할 것이라고 외친다.
그는 자객이다. 그림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고착화된 가치나 비인간성을 제도화 시키는 인간의 무딘 감성을 찌르는 자객이다. 그러나 그의 칼날은 세계를 파괴하는 칼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적 화합을 향한 칼날이다. 하나 더 강조할 것은 그가 노장적 가치에 경도 될수록 최근 작업에는 풍경적인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 거문도와 백도 여행을 통해 풍경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동양적 정서에 대한 형식 표현에 대한 사유도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풍경과 산수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그의 작업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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