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해체와 복원을 위한 담론: 허진의 <익명인간>
김복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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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가 왜 그림을 그리느냐, 또는 왜 그려야만 했느냐 하는 데서 하나의 화론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허진의 경우가 유독 이러한 질문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그에 관한 논의의 서두를 이러한 방향으로 펼쳐 보기로 하자.
80년대에 교육을 받고 90년대에 본격 활동해 온 세대답게 그는 우선 자신과 주변세계에 대 해 할 말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을 둘러싼 온갖 정보들의 홍수는 물론, 정치․경제 등 사회적 격변 속에서 일어나는 왜곡과 굴절, 갈등과 도전, 고독과 공포, 자유에 대한 갈망, 신세계에 대한 동경과 같은 단어들은 그에 관한 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푸는데 적어도 의미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90년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허진은 자신의 절 박한 심정을 이렇게 말하였다.
<예술은 논리적 사고를 잘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구체적 형 사엥 의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 현실을 인식시키는 일이다.... 올바른 삶을 왜 곡하고 희석시키는 문제들을 슬며시 밀어두고 판단마저 유보한 채, 문제의식의 단절로 인해 수시로 찾아드는 의욕상실과 무력감으로 뒤범벅된 자신감을 추스려야 하는 것이 나의 솔직 한 몰골이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한 작가의 언급은 대체로 두 가지를 확인시킨다. 그 하나가 사회적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올바른 부추김을 모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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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유들이 지금까지 세 번에 걸친 개인전과 평소 작품을 제작하는 근본 동기가 되었 다. 첫 개인전에 출품된 <<묵시>>등의 연작들에서는 특히 시대의 아픔과 일그러진 사회를 채우고있는 군상들, 가령 괭이를 든 농민, 연설하는 정치가, 노래하는 가수 등 일상의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 과거의 비슷한 역사적 인물들을 동시에 병존시키는 <복 합적 그림망(網)>을 시도하였다. 93년 제2회전의 <<다중인간>>에서는 부패한 현대인간의 모습을 가령 X-레이에 의해 투시해 볼 수 있는 환부의 왜곡상처럼 그 치부를 리얼하게 드 려다 보면서 살갗이라는 외적 가면을 쓰고 저지르는 위선의 껍질을 벗겨 보고자 하였다. 거 기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기만의 모습들이 다중적 이야기의 형태로, 마치 배우가 차례로 무대에 등장하듯이 화면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다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95년 제3회전의 <<달려라 슬퍼맨>>, <<자유에 대한 갈망>>같은 작품들은 비판과 고발은 물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위한 비젼을 아울러 담고 있었다. 권력과 자본을 둘러싼 부조리, 그리고 이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들의 모습을 거의 직설적으로, 이를 현대인의 이야기들을 실어 서슴없이 노래했다.
세 번에 걸쳐 발표된 대작들은 자신의 어조를 갖추고 현실 사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칼날을 분명히 하였다. 왜 그리고자 했고 또 그리지 않으면 안되었느냐 하는 것은 자명하였다. 그 확실한 방향은 부조리한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특히 현실을 <해체>하려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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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통해서 현실을 비판하고 해체하려는 시도는 네 번째로 갖는 이번 개인전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익명인간>> 연작을 통해서 그가 현실의 해체작업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그 족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익명인간>>의 '익명인간'은 그가 시대상황과 현실 속에서 파악하고 있는 굴절된 인간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뜻풀이로 말해 이름을 갖지 않는 인간이라는 뜻의 익명인간은 정확히 말해 실체를 상실한 인간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름뿐인 인간이거나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사람이면서 사람 이외의 생경한 사물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이를테면 물화되어 버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바로 이러한 익명인간을 등장시켜 그림의 화두를 풀고자 한다. 화두가 될 만한 이야기 거리로 자신의 초상화를 포함한 주변 군상들, 그리고 자연 생태계의 이모저모를 다루거나 (<<익명인간-여로>>, <<익명인간-현대 산수도>>), 부랑하는 현대 인간들과 그 주변(<<익명인간-현대십장생도>>, <<익명인간-18사략 이야기>>, <<익명인간-일상성의 7가지 색>>), 나아가서는 절규하는 인간과 격리된 고도(<<익명인간-고도를 기다리며>>)를 등장시키고 있다. 작가 자신을 포함해서 등장하고 있는 일체의 사물들이 문자 그대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질량을 갖고 정처없이 떠도는 덧없는 것들이다. 작가는 이것들이 본래의 모습을 상실함으로써 익명화 되었다는 것을 절규하면서 복원을 위한 연민의 상황도를 그리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이번 개인전의 주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복원을 기대하려는 담론을 토로하기 위해 일찍이 그가 다룬 방 있었던 것이 욕망의 문제였다. 세 번째 개인전에 출품했던 <<갈증>>, <<개벽-멈출 수 없는 탐욕>>등은 이미 그 전조라고 할 수 있었다. 욕망에 굶주린 인간들이 욕망을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욕망에 노예가 되어 인간성이 훼손되거나 그 반대로 훼손된 참상의 궁지를 극복하기 위해 개벽을 기다리는 정경들을 그려내는 일이 주요 과제였다.
이 과제는 욕망의 극한을 그려냄으로써 궁극적으로 욕망의 한계를 그어 보려는, 이를테면 욕망에 대한 해체의 시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이어서 이번에 제기하고 있는 것이 작가 자신을 비롯한 생태계, 나아가서는 그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기존의 문화 환경들의 복원을 시도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익명인간-여로>>, <<익명인간-고도를 기다리며>>, <<익명이간-현대 산수도>> 등의 연작들을 통해 작가 자신의 초상과 신체동작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익명인간의 주인공이자 개벽을 위한 화두의 주체가 됨으로써 자신과 더불어 지내 온 일체의 자연, 군상, 산수 같은 훼손되거나 낡은 기존의 사물들에 대한 해체와 복원을 적극 주도해 보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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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우리의 관심은 작가가 작품의 주체로 등장한 이후 그림을 통한 현실의 개조(해 체)의 의욕과 복원(개벽)의 시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일구어 온 <서술적 순환체제>의 방법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 나 이전보다는 그 세가 많이 감소되고 있는 것도 사시이다. 예컨데 상징이미지들 가운데서 과거의 이미지들 가령 산수도, 한문, 민화, 18사략의 이야기와 같은 단순히 화두적 성격을 갖는 것들로 제한하는 한편 주로 현대적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형상들, 특히 인간의 신체와 손, 얼굴, 동체같은 신체의 부위들이 작가의 초상과 관련해서 대거 등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때문에 이번 개인전은 오늘의 상황과 시간에 중심을 둔 미래의 예감도를 보여 주 고자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위해 그는 화면구성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환병열법이 아니 라 개조하고자 하는 현실의 단면들을 연작해서 꼴라지하는, 문자 그대로 <해체주의적>방식 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비교적 구조가 간단한 <<익명인간-고도를 기다리며Ⅰ>>과 같이 세 개의 단면들이 시리즈로 제작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좌우 양쪽에 절규하는 서술태의 자화상을 설정하고 이것들 가운데다 전통 산수와 민화풍의 패턴(꽃)을 중첩시켜 그린 고도를 삽입하고 있다.
<<익명인간-현대산수도Ⅱ>>역시 두 점의 전통 산수풍의 산과 하천, 그리고 서술풍의 자유를 갈망하는 군상을 엮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혀진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해체되어야 할 현실의 국면들에 차례로 맞추어진 회화적 국면들의 면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산수화풍으로 그려진 자연생태계가 훼손되기 이전으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옛 회화로서의 산수화풍 자체가 또한 오늘의 회화로서 새 의미를 갖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기대가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제시된다. 이를 두고 해체주의적이라는 주석을 달게 되는 것은 그의 작품들이 사적 순환의 연속개념보다는 차이와 단절의 양식들을 차례로 배열함으로써 읽고자 하는 자의 의도에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끔 허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그림을 읽고 감상하는 자는 그림들 배후에 그가 미래에 던지는 인간과 현실의 복원 가능성에 대한 열망을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깔아 놓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게 된다.
요컨데 허진의 근작 세계는 그림과 현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가 공존할 터전을 예감하면서 지금까지 다루어 온 역사주의적 순환논리에서 다의적․다중적 <신역사주의의 차연논리>를 선택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익명인간-일상성의 7가지 색>>연작이 시사하는 것은 그 하나의 좋은 본보기자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동물, 유형, 무형, 암호, 혼돈, 질서 등 여러 카테고리를 동시에 적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의 복합을 시도하고 있는 이 작품들은 그의 근작들이 장차 어디로 지향할 것인지를 예견케 한다.
넓게 보아 그의 근작들은 역사가가 미래를 위해 지웠다 다시 쓰는 현실의 이야기요, 이러 한 의미에서 해체와 복원을 위한<담론>으로서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해체와 복원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제3회전까지 일구어 온 <현실비판>중심의 그림들을 뛰어 넘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제4회전은 향후 그의 회화세계가 나아 갈 새로운 틀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199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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