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은 Lee, SangEun

Text: Artist Note

2021 [전시평문] 빈터(Void)라는 기표, 혹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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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상은
작성일 2024-08-11
조회 41

빈터(Void)라는 기표, 혹은 사건으로서의 붓질에 내포된 함의들 

빈터(Void)라는 주제로 시작되는 이상은 작가의 이번 전시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길고 짧은 붓터치에 의해 선과 색면이 화면 가득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작업들을 만나게 된다. 게다가 이 작업들 가운데 드러난 색면들은 대부분 일회적인 붓터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으로 선을 덮고, 색으로 색을 덮는 행위가 여러 번 반복되어 색면이 겹쳐지거나 덮힌 후 캔버스 표면 위에 최종적으로 남겨진 결과물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에 작가가 캔버스 위에 그려낸 것은 비워져 있는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페인팅 행위가 만들어낸 선과 색들에 의해 꽉찬 공간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캔버스 위에 이렇게 중첩된 흔적이 전면적으로 남겨져 있는 것을 보면 작가 역시 색면으로 공간을 채우는 작업을 해나가는 작업 과정에서 페인팅 작업을 수 많은 시간동안 반복함으로써 겹쳐지고 덧씌워진 붓질이 자연스레 드러나게 된 것임을 의도적으로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처럼 수많은 붓질로 화면을 채운 공간에 대해 빈터(Void)라는 역설적 명제를 제시하게 된 것은 작가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일반적 통념에서 벗어나 다른 지평과 토대 위에 바라보고자 하는 관점을 견지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은 작가의 작업은 사실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해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현재의 작업에 이르기까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초기 작업의 동인이 되었던 지점이나 최근 작업에 있어서도 그 중심 문제는 공간 이전에 시간의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은 작가의 작업에서 다루는 시간의 문제는 시간에서 그 흐름을 근간으로 고찰하는 선형적 시간관과는 차이가 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파편화된 사건들의 조합 혹은 불확정적 가능태들의 궤적으로 지칭될 수 있는 현재와 연결된 총체적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은 작가가 과거 평면과 입체로 표현한 작업들에 대해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층’, ‘시간의 집적이라는 명제를 사용하였던 것 역시 이러한 작가의 시간관이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빈터(Void)라는 개념 아래 작업들을 선보이게 된 것은 시간의 심층으로부터 공간의 의미를 좀 더 명료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는 다시 말해 무한의 시간이 결국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이는 마치 사진 작가 김아타가 텅빈 충만이라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장소를 고정해 놓고 사진기의 노출 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리게 되었을때 그 장소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음에도 결과물은 텅빈 공간으로 보이게 되는 것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맥락에서보면 이상은 작가의 작업은 김아타 작가 작업과 개념적으로 유사하면서도 작업으로 표출하는 방식은 역방향으로 풀어낸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시간 및 작업의 구조 면에서 보면 역방향으로 작업한 것의 의미와 그 효과를 확인하게 된다. 이상은 작가는 이처럼 오히려 수없이 많은 행위들을 드러내고 보여 줌으로써 그것의 대칭점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공의 근원인 텅 비워진 무의 세계를 감각의 뒤편에서 마주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이렇게 자신 작업의 중심 문제를 작업을 감상하는 가운데 경험의 영역에서 사유해 볼 수 있도록 한 것은 작가에게 이와 같은 관점과 문제 의식을 갖게 한 것이 그가 수행했던 작업 과정에서 그 스스로 경험에 의해 체득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사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같지 않은 수많은 붓질을 끝없이 반복하는 행위는 감각과 의식마저 무의 세계로 이끌어 갔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건으로서 의미를 갖는 작가의 붓질을 하는 행위들은 시간을 분할하며 각기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의미들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하도록 만들지만 현전하는 것은 남겨진 붓질의 흔적들 뿐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상은 작가의 작업은 단지 선과 색을 촘촘히 수집해 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실 붓질을 하였던 순간들 하나하나를 마치 어떤 일이 일어났던 사건 현장의 증거를 수집하듯 그 모두를 축적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그의 작업에서 그 개별적 시공간을 대리한 수많은 기표들을 만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건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기표만 남은 것일 수도 있지만 작가는 이 지점으로부터 그의 작업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작가는 이와 같이 기표만 남겨진 곳에서 작업 행위로서의 사건을 만나는 경험에 대해 빈터’(Void)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일 수도 있고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기 이전 혹은 이후의 장소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는 시간의 영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이번 전시와 관련하여 빈터 위에 자리한 시간, 그리고 시간의 쌓임 속에 존재하는 틈과 사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해 보고자 하였다고 한다.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 그 아무것도 없던 곳으로부터 틈과 사이가 발생하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가 감각하는 현전하는 세계라면, 작가에게 있어서 이는 무()와 동질의 세계일 것이며, 그곳에서의 경험과 기억은 결국 그 사건의 장소인 빈터’(Void) 자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텅빈 기표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는 행위이거나 일정한 감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가상의 경험에 비견되는 세계일 수 있다. 작가는 그 세계를 붓질이라는 같은듯 하면서도 서로 다른 행위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되는 수행(修行)과 같은 작업을 해나가는 가운데 스스로 붓질 혹은 사건으로서의 행위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고자 하고 또 그것을 쌓고 축적하여 시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는 빈터(Void)에 내포된 여러 함의들을 캔버스의 공간 위에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작업에서 빈터이자 그것과 겹쳐져 있는 파편화된 사건들의 궤적들을 만나게 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작업에서 만나게 되는 작가의 오랜 시간 동안 작업했던 수행의 흔적이자 구체적 행위로서의 붓질이라는 개별 사건들은 결국 빈터로 지칭되는 원초적 본질 위에 부유하면서 감상자들에게 오히려 그의 작업을 마주한다는 것, 혹은 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승훈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