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해체의 지점으로 바라 본 담론 완성 후의 상황에 대하여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정보가 문자의 형식으로 쏟아져 나온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는 계속 첨단화 되어가는 상황에서도 계약과 같은 중요한 사안은 여전히 문서의 형태로 남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류는 역사를 책의 형태로 기록하고 법 역시 법전과 같은 책의 형태에 의해 축적해 왔는데 책을 기록하는 수단은 텍스트와 같은 형식이었으며, 이때 그것을 기록하는 이들은 권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에 의해 권력은 더욱 확장되어왔다. 이러한 예들을 보면 텍스트는 무언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보리윤 작가의 작업은 의문을 갖게 될 것 같다.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내거나 의존하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잘라내고 해체하는 방식의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보리윤 작가에게 있어서 해체라 함은 두 가지 차원에서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 하나는 책에 대해 수술용 칼 등의 예리한 도구를 사용하여 얇게 칼질을 함으로써 개념적 차원을 너머 실제적 행위에 의해 해체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작가의 행위의 결과로 책이나 페이퍼와 같은 물질로 고착된 기반 위에서 문장과 문맥 구조에 의지하여 의미를 갖게 되고 그 결과 힘을 갖게 되었던 텍스트가 이제 그 지시 지점을 상실하고 의미적 차원에서도 해체의 상황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해체’라는 것은 이미 서구 현대철학에서 논의 되어온 바와 같이 포스트모던으로 지칭되는 근대가 막을 내린 이후 이어지는 우리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 의식이기에 작가가 이를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작업에서 실제적인 행위를 통하여 책으로 상징되는 텍스트에 대해 공격하는듯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즈음에는 의문을 갖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보리윤 작가는 사실 과도해 보일 정도로 텍스트가 담겨 있는 물체 즉 책과 같은 대상물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칼질하여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상태로 해체하는 행위를 한 결과물을 만들어 작업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작가에게 개인사적 사건이 있음을 작가가 밝힌 바 있다. 그렇지만 작가의 작업이 작업 공정상 여타 회화 작가들에 비해 몇 배나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 방식이고 이러한 작업을 오랜 시간 지속하기에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에 집중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개인사적 사건이 작가의 말처럼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였을 것이고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와 같은 텍스트를 해체하는 행위를 동반한 작업을 하게 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결국은 이러한 상황 전체가 그의 작업에서 회화라는 탈언어적 영역으로 이행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가 이러한 작업으로 이행하게 된 과정에서는 몇 가지 더 흥미로운 시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작가가 경험했던 사건에 있어서 필요했던 것은 분쇄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가늘게 잘려나간 문서를 짜맞춰 텍스트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텍스트가 문장으로 그리고 힘을 가진 문서로 복원하는 일, 바로 그것이 그 당시 사건에 해명이 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작업에서 이와는 반대 방향에서 작업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텍스트를 해체하는 것이 방식이다. 작가는 집요하리만큼 몰입하여 문장과 문자를 분해하고 해체한다.이는 아마도 한때 필요했던 문자의 뜻과 의미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해소되었을 때 바로 그 안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체감하였고 그것의 힘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보리윤 작가가 책을 칼질하여 얇은 띠와 같은 모양으로 자르는 방법에는 일정한 특징이 있다. 그 한가지는 글이 쓰여지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열 행을 맞춰 칼질을 함으로써 문장이나 문단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원래 텍스트이고 텍스트의 일부 중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알 수 있게 만드는 방식이다. 완전히 알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텍스트이며 어느 문장의 일부이었음을 남겨 놓는다는 말이다. 다른 방식은 문장의 일부 같기도 하고 문자의 일부 같기도 하지만 뜻이나 의미 혹은 텍스트였는지도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방식이다.이때 작가는 텍스트를 해체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실제적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과정에 있어서 왜 이렇게 이중적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아마도 작가가 단순히 어떤 대상을 해체시켜 버릴 때와 같은 감정의 해소 차원에서의 작업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즉 해체의 결과물을 감정의 배설물처럼 쏟아 놓는 과정으로서 행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작가는 무엇을 해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일부는 알아볼 수 있도록 하고 또 일부는 알아 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그것은 작업에 대한 작가적 전략이 있기 때문으로 본다. 이는 그의 작업 결과물들에서 확인된다. 텍스트가 분해된 잔해와 같은 종이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화면이지만 멀리 볼 때 일상적 회화와 다름없다. 단순화된 팝적 이미지에 매료되게 만들기 때문에 멀리서만 본다면 이 화면이 원래 종이 조각이었음을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는 다른 흔적들을 남겨 놓고 있다. 그것은 텍스트가 기록되었던 책의 일부가 가늘게 잘리고 붙여져 만들어진 화면임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은 이미지로 변환되어 있으나 텍스트들이 그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만드는 장치이고 구조물이 되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를 노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 주제를 ‘담론 완성 후’라는 명제로 제시하고 있다. 본디 작가가 개인적 사건에서 필요했던 것은 의미를 가진 문서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행하게 된 후, 이것은 이제 보리윤 작가에게 있어서 양가적 의미를 갖게 된 것 같다. 개인적 사건에서 이야기를 완성해 내는 일은 자신과 가족을 해명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어떤 한 사건에서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해 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어떠한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실현했을 때 그 텍스트로부터의 힘이라는 것의 실체도 동시에 알아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작가는 그래서 작가는 텍스트를 분해한 문서들을 베이스로 하여 작업하면서 여러 가지 형상의 이미지들을 등장시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이미지들은 일루젼(illusion)들이다. 책으로부터 추출하였고, 가늘게 잘려진 텍스트들이 담긴 종이조각이며, 이를 채색하여 이미지의 형상을 갖도록 배치한 것에 불과하지만 일상에서 마주치는 알아보기 쉬운 사물들을 명확히 지시하고 있다. 작업에 나타난 믹서기, 커피포트, 토스터, 그리고 나뭇잎과 같은 명료한 형상은 사실 그 사물의 실체는 아니다. 이미지가 대신한 사물의 형상은 텍스트가 인쇄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구조의 실체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이를 일루젼으로서의 이미지로 치환하여 작업을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보리윤 작가의 작업은 가시화된 세계가 일루젼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텍스트가 구축해낸 의미들의 불안정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잘려나가고 해체된 문서를 짜맞춰 복원해서 만들어낸 의미들처럼 작가가 말하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항구적이지 않고 임시적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작가가 제시하는 ‘담론 완성 후’라는 주제의 이번 전시는 그러한 맥락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특별히 그의 작업은 양면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가 완성해낸 일상 속 사물들의 이미지들은 어떠한 사물인지 즉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물의 이미지일 뿐이다. 심지어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색칠해진 텍스트들이다. 텍스트들 역시 읽혀지기도 하고 읽을 수 없기도 한 상태로 캔바스 위에 다시 재조합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보리윤 작가에게 있어서 ‘담론 완성 후’라는 지점은 의미를 형성하고 힘을 갖추게 되는 이야기의 완성 지점을 말하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이야기의 해체가 잉태된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 지점이 되고 있다는 말이다. 작가는 이처럼 양가적 의미를 지닌 위치에 텍스트의 조합으로부터 이야기를 완성시키고 그 지점으로부터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이미지와 텍스트가 드러내는 기표적 한계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결된 상태의 명료한 이미지들의 허구적 상황을 인식시키고 불안정한 텍스트들이 조합에 의해 한시적으로 지시하게 된 의미라는 것의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보리윤 작가는 작업을 완성함으로써 구축하게 되는 작가적 담론의 한시적 위치를 역시 같은 방식으로 관조적 위치에서 바라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자신의 삶, 그리고 자신의 작업에 있어서 ‘담론 완성 후’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그의 작업을 보는 이들과 대화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