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 전시서문
작성자
로사송
작성일
2023-10-14
조회
79
기표의 한계 지점에서 다중코드 생성 행위로서의 회화
이번 전시에서 송민자 작가가 보여주는 작업들에는 숫자와 화살표와 같은 여러 가지 부호들이 등장한다. 사실 현대미술에서 많은 작가들이 문자나 숫자 혹은 기호들을 사용하는 예가 있었다. 그것은 문자추상과 같은 방식이나 기타 무의미한 기호이자 일종의 조형 요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작가의 작업 의도에 따른 상징 혹은 알레고리적 암시를 위해 수사적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송민자 작가가 사용하는 숫자와 화살표는 독특한 측면이 발견된다. 단순히 어떤 대상이나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화면의 형식적 구성을 위한 조형요소로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화살표나 숫자의 경우 상당히 직접적이고 명시적인 지시성을 갖는 조형요소임에도 어떻게 보면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면서도 어떤 구체적 대상이나 특정한 의미를 지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파악되며, 동시에 기존의 의미들을 박탈시켜 조형적 도구로만 사용하고자 하는 것 역시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Double Codes’라는 제목을 통해 이와 같은 의문스러운 작업 방식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부터 유추해 보면 작가는 기의에 이를 수 없는 기표의 한계에 대한 대리적이거나 보충적 코드로서의 다중적 차원의 기표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시에 이중적이거나 복수적 기의를 갖게 되는 기표의 메타적 위치에 대한 시각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선형적 의미의 회로를 벗어난 생성적 의미들을 추적하고자 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작가는 숫자나 화살표와 같은 명료한 지시성을 가진 기호들을 등장시키지만 그 숫자나 화살표가 특정한 수의 의미나 특정한 방향을 지시하지 않는 모순적 상황에 빠지게 함으로써 그 한계성만을 노출시키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떠한 방향도 지시할 수 없음을 지시하는 것이며 어떠한 수도 표시할 수 없음을 표시하고 자 한다는 말이다.
수학에서는 분수로 표시할 수 있는 수를 유리수라고 하고 분수로 표시할 수 없는 수를 무리수라고 정의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를 24로 나누어서 1시, 2시와 같은 유리수 방식의 체계로 변환하여, 시계라는 공간적이고 시각적인 도구 위에 그 위치를 그려서 표시해 놓는다고 하여도, 정확히 떨어지는 24분의 1이라는 지점은 관념일 수 밖에 없기에, 사실 1시나 2시라는 지점을 시계바늘이 그 위를 지나갈 수는 있다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그 어느 한 점을 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무한히 계속되는 무리수뿐만 아니라 유리수마저도 모두 개념에 불과할 뿐이기에 점을 가시적으로 찍는 순간 그것은 점이 아니라 면적을 갖게 되고 관념 속에서 생각해냈던 숫자가 가지는 의미를 그대로 그려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마치 이 시계바늘처럼 시공간 위를 지나가며 살아가고 있지만 현전이라고 말하는 눈에 보이는 어떤 한 순간에 대해 그 지점을 정확히 표시해내거나 그려낸다는 것은 개념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전을 가장 잘 드러내는 도구라고 여겨졌고, 포토리얼리즘이라는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사진기라는 도구도 아무리 빠른 고속카메라를 사용한다 하여도 원하는 순간을 잡아낼 수는 없다. 순간이라고 규정하는 바로 그 때, 그 순간은 셀 수 없이 수많은 순간이라는 시간들을 함축하고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은 인간이 보고 있는 이 세계가 공간적으로도 가시적 차원의 해상도 상에 형성된 이미지일 뿐 시간을 나누듯이 공간을 수없이 나누어 그 궁극에 이르면 원자라는 단위 이하의 세계는 결국 미지의 에너지의 세계이고 물질적 입자는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미미한 상태의 텅 비워진 공간임을 밝혀내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지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숫자 그리기와 화살표 그리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그 끝도 방향도 알 수 없는 폐쇄회로 속에서 알 수 없는 그곳을 향해 화살표로 방향을 그려내며 정의할 수도 셀 수도 없는 수로 순간들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미 그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살아있는 이 순간순간 들을 숫자로 화살표로 이름 짓기를 계속하고 그려내기를 계속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시계바늘이 제대로 지시하고 표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라는 지점을 단위적 기표에 의해 임시적으로 표시하고 시계바늘은 그 부정확한 기표들 위를 지나갈 수 밖에 없었듯이, 작가 자신이 이 부실한 기표 체계와 세계 속에서 매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작업하며 시공간과 직접 관계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Double Codes’ 방식에 의해 그가 그려낼 수 있는 것에 대해 불신하고 은폐하는 동시에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무엇인가를 드려낼 수 있을 것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업이라는 시공간에 직접 부딪쳐 그려내고 또 그려내고자 한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